권벽(權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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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0년(중종15)∼1593년(선조26) = 74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대수(大手), 호는 습재(習齋)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좌승지(左承旨)권기(權祺)의 아들이며, 목사김세영(金世英)의 외손자이다.

관직 진출 침체

24세이던 1543년(중종38)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홍문관(弘文館)정자(正字)에 발탁되었다. 이때에 안명세(安名世) · 윤결(尹潔) 등 청류 선비들과 교유를 즐겼는데 1545년(명종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서 두 사람이 당시 대윤(大尹)윤임(尹任) 등과 친하다며, 소윤(小尹)윤원형(尹元衡) 일파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과 교유를 끊고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 결과 명종 시대에는 관직이 침체되었으나, 선조 시대에는 많은 활동을 하였다.

선조 시대의 활동

내직(內職)은 승문원의 정자(正字) · 박사(博士)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 · 사예(司藝) · 사성(司成)을 거쳐 예조 · 공조의 좌랑(左郞)과 호조 · 예조의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종부시(宗簿寺) ·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을 거쳐서 선공감(繕工監) · 종부시 · 장악원 · 예빈시(禮賓寺) · 사복시(司僕寺) · 군자감(軍資監) · 제용감(濟用監) · 봉상시(奉常寺)정(正)을 두루 거쳐 통례원(通禮院)의 좌통례 · 우통례로 옮겼다. 그 뒤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형조 참의 · 예조 참의와 장례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로 승진하였다.

외직(外職)은 성주목사(星州牧使) · 원주목사(原州牧使) · 여주목사(驪州牧使)와 선산부사(善山府使) · 장단부사(長湍府使)· 안변부사(安邊府使)를 지냈다. 1578년(선조11) 3월 순무어사(巡撫御使)허봉(許篈)의 탄핵을 받아 안변부사에서 파직당하였다. 그 뒤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외교 및 저술 활동

그는 중국과 왕래하는 외교문서에 쓰이는 이문(吏文)에 밝아서 1572년(선조5) 춘당대(春塘臺) 이문시(吏文試)에서 3등으로 합격하였다.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중국 사절을 접대하였고,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일본에서 파견한 사절을 접대하였다. 또 서장관(書狀官)과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두 번이나 중국 연경(燕京)을 다녀왔다.

문장에 능하여 좌의정(左議政)노수신(盧守愼), 우의정(右議政)정유길(鄭惟吉)이 선조에게 그의 시문을 극구 칭찬하였다. 저서로는 『습재집(習齋集)』 8권이 있다.

묘소와 추증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위양리(渭陽里)에 있으며, 이식(李植)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택당집(澤堂集)』 별집 권7)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조실록(宣朝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택당집(澤堂集)』
  • 『기재집(企齋集)』
  • 『덕계집(德溪集)』
  • 『수은집(睡隱集)』
  • 『성소복부고(惺所覆瓿藁)』
  • 『은봉전서(隱峯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