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
콘텐츠 주제
기획의도
기획배경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과 다른 나라와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 두 명이 합쳐져 조를 형성하였다. '교류’와 ‘정치’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결하여 절충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타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위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
기획 목적
정치 교류사를 되돌아보며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 흐름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미친 영향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고 주요 사건의 결과도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이러한 주제를 선정했다.
기대하는 바
타국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일련의 탐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기대하는 바이다.
국가별 통시적 설명
일본
미국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한국과 미국의 첫 조우와 무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가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
러시아
중국
온톨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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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구조
클래스(Class)
클래스 | 설명 | 노드 |
---|---|---|
나라 |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나라들이다. 각 문서에 각 나라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통시적으로 서술하였다. |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
사건 | 주요 사건들을 노드로 만들었다. 각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고, 각 사건이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_1884년 을사조약 한일기본조약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임오군란 톈진 조약<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한국전쟁 코로나19 아관파천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냉전 종식 가쓰라-태프트 밀약 민족자결주의 선언 미군정 베트남 전쟁 북미정상회담 결렬 |
시기 | 시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노드를 만들었다. | 개항부터 국권피탈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6공화국 이후 |
- leads
- 설명: 나라와 해당 나라가 관련된 사건을 연결한다.
- 해당노드:
- 일본 → 운요호사건
- 일본 → 강화도 조약
- 일본 → 갑신정변_1885년
- 일본 → 을사조약
- 일본 → 한일기본조약
- 일본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일본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 일본 → 임오군란
- 일본 → 톈진 조약
-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
- 중국 → 갑신정변
-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중국 → 임오군란
- 중국 → 톈진 조약
- 중국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중국 → 카이로 회담
- 중국 → 한국 전쟁
- 중국 → 코로나19
- 중국 → 냉전 종식
- 러시아 → 한국 전쟁
- 러시아 → 아관파천
- 러시아 →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 러시아 → 냉전 종식
- 미국 → 가쓰라-태프트 밀약
- 미국 → 민족자결주의 선언
- 미국 → 카이로 회담
- 미국 → 한국 전쟁
- 미국 → 냉전 종식
- 미국 → 미군정
- 미국 → 베트남 전쟁
- 미국 → 북미정상회담 결렬
- leads
- isRelatedTo
- 설명: 나라와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
- 해당노드:
- 일본 → 개항부터 국권피탈
- 일본 → 일제강점기
- 일본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 일본 → 6공화국 이후
- 중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
- 중국 → 일제강점기
- 중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 중국 → 6공화국 이후
- 러시아 → 개항부터 국권피탈
- 러시아 → 일제강점기
- 러시아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 러시아 → 6공화국 이후
- 미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
- 미국 → 일제강점기
- 미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 미국 → 6공화국 이후
- isRelatedTo
- happenedAt
- 설명: 해당 사건과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
- 해당노드:
- 운요호 사건 → 개항부터 국권피탈
- 강화도 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
- 갑신정변_1884년 → 개항부터 국권피탈
- 가쓰라-태프트 밀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
- 아관파천 → 개항부터 국권피탈
- 임오군란 → 개항부터 국권피탈
- 톈진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
- 을사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
- 민족자결주의 선언 → 일제강점기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일제강점기
-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
- 카이로 회담 → 일제강점기
- 한일기본조약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 미군정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 베트남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 한국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 6공화국 이후
- 코로나19 → 6공화국 이후
- 냉전 종식 → 6공화국 이후
- 북미정상회담 결렬 → 6공화국 이후
- happenedAt
마인드맵
주제 마인드맵
사진 첨부 ※ 수업에 했던 포스트잇 사진 가능
노드 마인드맵
사진 첨부
기여
팀원 | 기여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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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가 | 주제 선정, 전체적인 내용 설정, 미국 문서 작성, 관계 설정 및 작성, 동기 및 결론 작성, 발표 |
텀블러 | 전체적인 내용 구상 기여, 전체적인 위키 문서 틀 작성, 온톨로지 작성, 일본 관련 문서 작성, 역할분담 작성, 발표용 ppt 제작 |
소금토마토 | 추가예정 |
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정치교류사
도출한 결론
국내 정세 안정화 선행 필요성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나서는 타국의 정치적 영향도, 타국이 영향을 준 경우도 줄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보았는데, 타국이 영향을 줘서 흔들릴 만큼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없어졌고 따라서 타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국의 안 좋은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그다음으로 내린 결론은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즉, 국제 사회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희가 다룬 네 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때론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의 이면에는 늘 치밀한 각국의 손익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즉, 타국은 우리나라가 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이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대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피탈 당할 때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를 너무 믿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오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외교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피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혼란을 막으면서 우리 문제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실리적인 외교 방안을 모색하여 평화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아쉬운 점과 개선점
주제 자체를 양이 너무 많고 내용도 어려운 주제로 정한 데다 잘하고 싶은 의욕으로 많은 문서를 만들고자 한 탓에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위키로만 할 수 있는 여러 툴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 또 위키 관련 활동을 한다면, 시간과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주제, 적절한 개수의 노드를 미리 설정해서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툴을 활용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