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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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일본 군함인 운요호가 1875년 9월 20일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입하여 조선 수군의 방어 목적 포격을 받고, 이에 대항하여 함포사격을 해 다수의 민간인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이후 일본이 이 사건의 책임을 물으며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게 된다.

배경

제국주의와 일본의 개항

일본 또한 토쿠가와막부가 설립된 이후 1630년대 말부터 약 200년간 쇄국체제를 유지하였다. 서양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서방무역을 나가사키항에 제한하였으며 교역 상대도 네덜란드 한 나라로 제한하였다. 그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일본 내에서 천주교를 근절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해외무역으로 인한 이윤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이 되면서 막부의 군사력이 약화됨과 동시에 서양 열강이 대등한 외교 및 자유로운 통상을 요구하게 된다. 또, 이에 앞서 18세기 말부터 외국선이 출몰하며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미국 페리제독과 일본의 개항

일본의 개항에 주요한 역할을 한 열강은 미국이다. 1852년 1월 해군제독 마듀 페리(Mathew C. Perry)가 파견되었다. 페리제독이 미국 동인도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1853년 7월에 도착하여 개항을 요구하였다. 일본은 고민 끝에 미국과의 군사적 대결에서 승산이 없을 것을 예상했으며 개항을 하기로 하는 ‘카나가와 조약’을 체결한다. 카나가와 조약에는 최혜국대우 조항이 포함되었다.

경과

운요호 사건의 경과

서구 열강의 포함외교에 의해 개항했던 경험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해 일본은 해군 군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때 파견된 배가 운요호이다. 운요호는 영국에서 수입한 근대식 군함이다. 일본은 운요호를 부산에 침입시켰고 이에 대해 조선은 항의했지만, 일본 측은 외교사절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며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9일 군함 제2테이묘호가 부산항으로 들어와 합류했고 두 군함이 함포사격을 하면서 위기감이 고조된다. 8월 21일 운요호가 강화도 해안에 정박했다가 선원 일부가 사전 예고 없이 배로 한강 하구를 거슬러 향해하자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하였다. 운요호 또한 함포사격을 하여 다수의 민간인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이어진 일본의 개항요구

그러나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일본은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무력시위를 하며,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게 물었다. 조선은 일본의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강제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개항하게 된다.

운요호
위 사진은 운요호의 사진이다.

조선에 미친 영향

조선의 포격은 불법침입자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그 포격으로 인해 운요호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강제 개항을 하게 된다.
운요호 사건은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 이래로 조선이 계속해오던 쇄국정책에 종지부를 찍게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강화도 조약이라는 불평등한 조약을 맺게 되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관련 영상

참고문헌

<<德川막부의 천주교 禁敎정책에 관하여는 Jurgis Elisonas, “Chirstianity and Daimyo” in John Whitney Hall. ed.,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Vol. 4, pp.301∼372 참조.>> <<德川시대 말기 일본의 국내정세에 관하여는 William G. Beasely, “The Meili Restoration”(Stanford:Stanford University Press, 1972), pp.74∼9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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