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목차
미국과 한국의 정치 교류
초반 (외교적 관심 ~ 조미수호통상조약)
미국이 한국에 외교적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시대 순조 재위 시기인 1834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시아에 특파된 로비츠 미국 특사가 본국에 "동부 아시아에 조선이라는 작은 반도 국가가 있다.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미국이 조선과 경제 교역을 맺었으면 좋겠다"는 보고를 했다. 1845년 헌종 시기, 미국 국회의원 Z. 프래트가 조선 왕조에 통상 사절 파견을 제안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하면서, 조선은 서양 세력과의 모든 교역 및 통상을 거부하고 개방도 불허하는 강경책을 펼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 입성해 통상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리자, 조선 관군과 평양 주민들이 이를 화재로 전소시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미국은 군사적으로 우세했으나, 조선의 개항 요구를 받아내지 못하고 철수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자,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본격적인 한미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서구 열강과 체결한 최초의 조약으로, 청나라가 러시아 견제와 조선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중개했다. 이후 1888년 박정양[1]이 초대 공사로 파견되어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접견했고, 조선 최초의 재외공관인 주미공사관이 설치되었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 ~ 외교 단절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 한미 관계는 20세기의 격동기에 들어서며 변화를 겪게 된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필리핀을 차지했으며, 1905년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의 총리 가쓰라 다로 사이에 밀약이 체결되었다. 이 밀약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고종의 대한제국을 구원 요청을 무시하고, 친일 성향을 드러내며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지지했다.
루스벨트의 중재로 체결된 1905년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 주권이 박탈되었다. 미국은 대한제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한성부에 있던 외교 공관을 철수했다. 이후 경제적 통상도 대폭 축소되었다. 루스벨트의 후임인 윌리엄 태프트 역시 일본을 지지하며 대한제국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 한미 관계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급격히 변화했으며, 이는 대한제국의 멸망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이어졌다.
한반도 철도와의 관계
경인선의 초기 역사와 미국의 참여
경인선은 한반도 최초의 철도로, 1899년 인천과 서울을 연결하는 철도다. 초기 경인선 부설권은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조선 정부로부터 1896년에 획득했다. 모스는 조선에 대한 교역 기회를 확대하려 했으나,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자금 문제와 일본의 개입
제임스 모스는 경인선 건설을 위해 미국과 다른 외국 자본을 유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1897년 일본의 경인철도인수조합에 부설권을 양도했다. 일본은 경인선 부설을 통해 조선 내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군사적∙경제적 통제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경인선의 완공
경인선은 1899년 9월 18일에 공식 개통되었다. 이 철도는 조선의 물류와 인구 이동을 촉진하며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이끌었다. 경인선은 인천항과 서울을 연결하여 수입 물자와 인적 자원의 신속한 이동을 가능하게 했으며,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각주
- ↑ 박정양 (朴定陽, 1841.12.24. ~ 1905.11.02.) :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온건 개화파의 대표 인물이며, 조선 최초의 주미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