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18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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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총국.jpeg

갑신정변이 발생했던 우정총국의 모습이다.

개요

갑신정변은 1884년 급진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급진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법, 서재필 등이 일으켰으나 청나라가 군사 개입을 하여 3일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과 갑신정변

1884년 청불전쟁이 일어나며 청의 조선군이 줄어들자 개화당은 이를 기회삼아 정변을 하고자 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 때 기존의 소극적 대한 정책을 변경해 김옥균과 정변에 협력하였다.
정변 진행 도중 청군 200명의 입경 소식을 접한 일본 공사는 청일 양국의 충돌을 우려해 군대를 철수하고자 했다. 결국 일본군은 청군의 공격을 받아 철수하게 되었으며 갑신정변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청과 갑신정변

갑신정변 자체가 당시 조선의 급진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기 때문에 청나라와의 관계가 크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다소 심해진 상태였고, 이에 대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지원을 요청한 것은 민씨 정권이었는데, 그들에게 급진개화파는 정치적으로 위협적 존재였기 때문에 청나라의 힘을 빌려 정치적 압박을 가한 것이 그 까닭이다. 상술했듯 청불전쟁이 본격화되고 일본 정부가 소극적 대한 정책을 변경하며 정변에 협력해 갑신정변이 발발하였으나, 청국군의 개입으로 인해 3일만에 정변이 실패로 돌아간다.

갑신정변이 조선에 미친 영향

청나라의 내정 간섭으로부터 독립을 꾀하기 위한 정변이었으나, 이것이 청나라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오히려 더욱 본격적으로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친청파들이 정국을 좌우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일본 측은 정변으로 인해 소실된 공사관 건물에 대해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였고, 이로 인해 1884년 한성조약이 체겨뢴다.

정변 이후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고, 양국 간 교전 가능성이 높아지던 중 청일 양국군의 철수를 규정한 텐진조약이 1885년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청일 양국은 한쪽이 조선에 파병을 할 경우 반드시 상대방 국가에 알려야 하는 의무가 생겼는데, 이것은 이후 동학농민운동 당시 청의 파병에 이어 일본의 파병이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관련 자료


참고문헌

<<청과 갑신정변, 갑신정변이 조선에 미친 영향과 관련하여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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