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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057&cid=46623&categoryId=46623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 ||
+ |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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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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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143&cid=62048&categoryId=62048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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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cid=43667&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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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 | ||
==<div style="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온톨로지== | ==<div style="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온톨로지== |
2024년 6월 22일 (토) 22:23 판
목차
콘텐츠 주제
기획의도
기획배경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과 다른 나라와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 두 명이 합쳐져 조를 형성하였다. '교류’와 ‘정치’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결하여 절충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타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위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
기획 목적
정치 교류사를 되돌아보며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 흐름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미친 영향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고 주요 사건의 결과도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이러한 주제를 선정했다.
기대하는 바
타국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일련의 탐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기대하는 바이다.
국가별 통시적 설명
일본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역사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많은 갈등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 관련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한일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교류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서에서는 현재 한일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항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요 사건을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문서와 같은 내용이 '일본' 문서에도 실려 있다.
개항부터 국권피탈 전까지, 일본 침략의 전조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은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고 조선이 쇄국정책을 시행하는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하게 발전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무력시위를 하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었고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 결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면이 많았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이는 불평등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데, 갑신정변_1884년을 통해 청이 조선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이는 국권피탈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이다. 정치 단체를 만들거나 의견을 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민족 신문이 폐간되었다. 헌병이 직접 벌을 내리는 즉결심판권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교사는 군복에 칼을 찼다. 일본어가 '국어'로 교육되었으며 중등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고등 교육 기관은 없앴다. 또, 토지 조사 사업이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토지를 뺴앗아갔다. 전체 토지의 40%가 일본에 넘어갔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팔렸다.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탄압, 감시, 문화 말살, 수탈을 위한 정책이었다. 헌병경찰제도가 보통경찰제도로 변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경찰 인력과 시설은 늘어났다. 민족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계속되었다. 교육 기회 확대를 주장했지만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데 불과했으며 조선인의 취학률은 낮았고, 고등교육은 여전히 실시되지 않았다. 태형령이 없어졌지만 치안 유지법을 제정해 강력하게 탄압했다.
1930년대:민족말살통치시기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이다.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창씨개명, 일선동조론이 민족말살통치의 일부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한 통치이며, 이 시기 많은 강제동원과 수탈이 이루어졌다.
1945년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해방 후부터 5공화국까지, 일본의 영향 축소
해방 후부터 일본과 한국은 교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한국은 일본보다는 다른 나라와 더 많은 교류를 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국교를 정상화하고 교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6공화국 이후, 한국과 일본의 현 좌표
한국과 일본은 많은 교류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겪었고, 식민 지배 당시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적인 갈등의 골이 깊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강제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정과 배상, 개인의 청구권 문제로 갈등이 있다. 또,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존재한다. 일본이 전범국으로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일본이 저지를 일을 축소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또,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교과서 서술도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독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땅임이 명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있다.
미국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한국과 미국의 첫 조우와 무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
러시아
중국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관계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이후로도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의한 침탈의 과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처럼 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일본과 함께 조선의 정치에 다시 관여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
온톨로지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
콘텐츠 구조
클래스(Class)
클래스 | 설명 | 노드 |
---|---|---|
나라 |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나라들이다. 각 문서에 각 나라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통시적으로 서술하였다. |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
사건 | 주요 사건들을 노드로 만들었다. 각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고, 각 사건이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_1884년 을사조약 한일기본조약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임오군란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한국전쟁 코로나19 아관파천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냉전 종식 가쓰라-태프트 밀약 민족자결주의 선언 미군정 베트남 전쟁 북미정상회담 결렬 |
시기 | 시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노드를 만들었다. | 개항부터 국권피탈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6공화국 이후 |
- leads
- 설명: 나라와 해당 나라가 관련된 사건을 연결한다.
- 해당노드:
- 일본 → 운요호사건
- 일본 → 강화도 조약
- 일본 → 갑신정변_1885년
- 일본 → 을사조약
- 일본 → 한일기본조약
- 일본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일본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 일본 → 임오군란
- 일본 → 톈진 조약
-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
- 중국 → 갑신정변
-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중국 → 임오군란
- 중국 → 톈진 조약
- 중국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중국 → 카이로 회담
- 중국 → 한국 전쟁
- 중국 → 코로나19
- 중국 → 냉전 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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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요호 사건 → 개항부터 국권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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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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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맵
주제 마인드맵
사진 첨부 ※ 수업에 했던 포스트잇 사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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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
팀원 | 기여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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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가 | 주제 선정, 전체적인 내용 설정, 미국 문서 작성, 관계 설정 및 작성, 동기 및 결론 작성, 발표 |
텀블러 | 전체적인 내용 구상 기여, 전체적인 위키 문서 틀 작성, 온톨로지 작성, 일본 관련 문서 작성, 역할분담 작성, 발표용 ppt 제작 |
소금토마토 | 추가예정 |
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정치교류사
도출한 결론
국내 정세 안정화 선행 필요성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나서는 타국의 정치적 영향도, 타국이 영향을 준 경우도 줄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보았는데, 타국이 영향을 줘서 흔들릴 만큼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없어졌고 따라서 타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국의 안 좋은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그다음으로 내린 결론은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즉, 국제 사회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희가 다룬 네 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때론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의 이면에는 늘 치밀한 각국의 손익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즉, 타국은 우리나라가 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이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대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피탈 당할 때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를 너무 믿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오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외교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피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혼란을 막으면서 우리 문제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실리적인 외교 방안을 모색하여 평화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아쉬운 점과 개선점
주제 자체를 양이 너무 많고 내용도 어려운 주제로 정한 데다 잘하고 싶은 의욕으로 많은 문서를 만들고자 한 탓에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위키로만 할 수 있는 여러 툴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 또 위키 관련 활동을 한다면, 시간과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주제, 적절한 개수의 노드를 미리 설정해서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툴을 활용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