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채(朴世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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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1년(인조 9)~1695년(숙종 21) = 65세]. 조선 중기 인조~숙종 때에 활동한 학자·문신. 행직(行職)은 좌의정(左議政)이다. 자는 화숙(和叔)이고,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증조부는 대사헌(大司憲)박응복(朴應福)이고, 조부는 금계군(錦溪君), 형조 판서(判書)박동량(朴東亮)이며, 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박의(朴猗)이고,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영의정(領議政)신흠(申欽)의 딸이다. 박세당(朴世堂)·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는 그와 가까운 혈족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송순석(宋純錫)이 그의 사위이다.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의 문인이다.

인조~현종 시대 활동

박세채는 1638년(인조 16) 7세 때에 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고, 1648년(인조 26) 18세에 사마시(司馬試)에서 진사(進士)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러나 성균관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학교도 그만두고 과거 공부도 포기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율곡(栗谷)이이(李珥)가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을 가지고 학문을 시작하였다. 선조 말년부터 제기되었던 이이·성혼(成渾)의 문묘 종사(從祀) 문제가 당시에 다시 제기되었는데, 영남의 유생 유직(柳稷)은 이들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이를 존경하였던 박세채는 유직의 상소가 부당함을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그런데, 효종의 비답(批答) 속에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었으므로, 박세채는 이에 분개하여 과거에 대한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651년(효종 2) 그는 김상헌과 김집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고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과도 학문 교류를 하였다. 1659년(효종 10) 봄에 천거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가 되었다. 이 해 5월 마침 효종이 돌아가면서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상(服喪)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그는 3년설을 주장한 남인계(南人系)의 대비복제설(大妃服制說)을 반대하고, 송시열·송준길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여 관철시켰다. 이로 인해 그는 서인(西人) 측의 이론가가 되었다. 1668년(현종 9) 7월에 진선(進善)이 되고, 1669년(현종 10) 장령(掌令)이 되었다.

숙종 시대 활동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1659년 <기해 복제(己亥服制)> 때에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 측의 여러 신하들이 다시 추죄(追罪)를 받게 되었다. 이때 박세채는 대사간(大司諫)인 남천한(南天漢)에 의해 맨 먼저 공격을 당하게 되었는데, 결국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楊根)·지평(砥平)·원주(原州)·금곡(金谷)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다시 등용되는 1680년(숙종 6)까지 6년간은 도리어 그에게는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는 『독서기(讀書記)』, 『춘추보편(春秋補編)』, 『심학지결(心學至訣)』 등을 저술하였다.

이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득세하면서 1680년(숙종 6) 다시 등용되었는데,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를 거쳐 이조 참의(參議),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사헌부 대사헌, 호조 참판(參判), 이조 참판 등을 거쳐 1688년(숙종 14) 5월에 이조 판서(判書)가 되었다. 이 해 6월에 ‘시무 십이조(時務十二條)’에 관한 책자를 올렸고, 1689년(숙종 15)에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684년(숙종 10)일어난 <회니(懷尼)의 분쟁>을 계기로 서인이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박세채는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하여 양편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하였으나, 끝내는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는 숙종 초기에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였으나, 노론과 소론의 분열 이후에는 윤증(尹拯)을 두둔하고 나아가 소론의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가지며 활동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에 그는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草野)에서 생활을 하였다. 이 해는 그의 나이 59세이다. 이때부터 6년 동안이 그의 일평생에 있어서 많은 저서를 통해 큰 업적을 남기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기간 중에 소론계인 윤증과 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한 학자들과 서신 내왕이 많았으며,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비판과 유학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을 밝히려는 저술 경향을 보인다. 특히 이 기간에 이루어진 저술로서 중요한 저서는 『양명학변(陽明學辨)』, 『천리양지설(天理良知說)』, 『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補集)』, 『이락연원속록(伊洛淵源續錄)』,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삼선생유서(三先生遺書)』, 『신수자경편(新修自敬編)』 들이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 이후, 노론의 영수(領袖)로 활약하던 송시열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우찬성(右贊成)에 임명 되었다가 좌의정으로 발탁되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그는 학문이 진실하고 견식이 정심(精深)하여 경국제세(經國濟世)를 자기 임무로 삼고 편당에 물들지 않았는데, 이후 붕당(朋黨)을 경계하는 교서(敎書)를 임금에게 제진(製進)하자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다. 그 뒤 그는 본인의 병(病)과 노모(老母)의 공양을 이유로 사면해 주기를 바라는 차자를 올리고, 파주(坡州)로 갔다. 그 후 여러 번 소명(召命)이 있었지만 끝내 조정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1695년(숙종 21)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에는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을 주장하여 당쟁을 없애려 노력하였다.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 등과 함께 이이와 성혼에 대한 문묘 종사를 확정시키는데 기여하였으며, 대동법(大同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관직에 물러나서는 예학 연구와 제자 육성에 힘썼다. 그는 글씨도 잘 썼다.

학문 경향과 저서

이이의 『격몽요결』로 학문을 시작한 그는 김상헌과 김집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송시열과 송준길과도 학문 교류를 하였다. 마침 1659년(효종 10)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服喪問題)가 크게 거론되게 되었는데, 그는 3년설을 주장한 남인계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송준길의 기년설을 지지하여 관철시켰다. 이로 인해 숙종 초 남인 집권 시 정치적 패퇴를 맛보았으나 <경신대출척>으로 다시 정계에 나섰다. 1683년(숙종 9) 노소(老少) 분립 시 소론의 영수가 되었고,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 이후 좌의정에 올랐다. 이와 같은 정치적 배경으로 남구만·윤지완 등과 더불어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학문 경향은 역시 당시의 시대 정신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 일평생을 학문의 계통을 분명히 하고 수호하는 도통수호(道統守護)와 사회규범으로서 예론(禮論)을 확립하는데 매진했다. 이웃 중국 대륙의 질서 변화에 따른 위기 의식 속에서도 도통수호 의식 차원에서 『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補集)』을 저술하여 중국 유학의 학문을 밝혔고, 그와 아울러 방대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써서 동방의 도학 연원을 밝혔던 것이다. 그의 예학에 관한 저술은 학적 업적을 남긴 것으로, 그를 예학의 대가라고 칭할만하다. 『남계예설(南溪禮說)』, 『육례의집(六禮疑輯)』 등은 예(禮)의 구체적 실천 문제를 다룬 저술로서 과거에 보지 못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식절차까지 문제 삼고 있다. 이러한 예학의 내용은 17세기 성리학의 예학적 전개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며 예학의 구현이라는 오륜적 근거를 밝히는 학적 과제가 된다.

한편 그는 정치적으로 탕평(蕩平)을 주장하여 『황극탕평론』을 발표하였으나, 실제 소론의 정치적 중심 인물로서 활동하였다. 그밖에 그는 이단(異端)을 비판하고 나아가 배척하는 일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양명학변(陽明學辨)』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양명에 대한 비판은 도통수호라는 입장에 근거한 것이나 현실적으로는 그의 제자 정제두가 양명설(陽明說)을 신봉함으로써 사우(師友) 사이에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그는 매우 폭넓고 비중 높은 활동을 한 학자이므로 많은 학도(學徒)들이 모여들어 일세(一世)의 유종(儒宗)으로 추존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남계집(南溪集)』, 『범학전편(範學全編)』, 『시경요의(詩經要義)』, 『춘추보편(春秋補編)』, 『독서기(讀書記)』, 『대학보유변(大學補遺辨)』, 『심경요해(心經要解)』, 『학법총설(學法總說)』, 『속경연고사(續經筵故事)』, 『소학독서기(小學讀書記)』, 『양명학변(陽明學辨)』, 『심학지결(心學至訣)』, 『남계수필록(南溪隨筆錄)』, 『신수자경편(新修自敬編)』, 『육례의집(六禮疑輯)』, 『삼례의(三禮儀)』, 『사례변절(四禮變節)』, 『가례요해(家禮要解)』, 『가례외편(家禮外編)』, 『남계예설(南溪禮說)』, 『시무만언봉사(時務萬言封事)』, 『남계연중강계(南溪筵中講啓)』, 『남계기문(南溪記聞)』, 『주자대전습유(朱子大全拾遺)』,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소학집주부록(小學集註附錄)』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자품이 명수(明粹)하고 덕성(德性)이 온순(溫醇)한 그는 어린 나이에 도학(道學)에 뜻을 두어 조예(造詣)가 정심(精深)하였다. 성리(性理)에 침잠(沈潛)한 것은 이황(李滉)을 배우고, 경제(經濟)를 담당하는 것은 이이를 배웠으며, 예학(禮學)에 깊은 것은 김장생(金長生)과 같았다. 기위(奇偉)·괴걸(魁傑)한 자품은 비록 송시열에 미치지 못했으나 자상(慈詳)함과 온화함은 그보다 나았고, 화후(和厚)·근독(謹篤)의 풍도는 비록 윤증(尹拯)에게 미치지 못했으나, 명백(明白)·솔직(率直)함은 그보다 더 하였다. 공부(工夫)의 각고(刻苦)와 문로(門路)의 정당함, 그리고 출처(出處)와 언행(言行)이 깨끗하여 하자가 없음에 있어서는 거의 근세(近世) 제유(諸儒)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당론(黨論)이 있은 이후로부터 세상의 학자가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경우가 적었는데, 그는 오직 의리만을 위주로 하고 전적으로 찬동하거나 전적으로 부정하는 경우가 없었다.

1680년(숙종 6)에 청의(淸議)를 주장한 것과 1688년(숙종 14)에 역종(逆宗)을 논한 것과, 1694년(숙종 20)에 장희재(張希載)를 토죄(討罪)한 것은 일에 따라 바른 말을 한 것으로 모두 세도(世道)에 공로가 있었으며, 비록 피차(彼此) 간에 서로 기뻐하지 않았지만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송시열과 윤증 양가(兩家)의 분쟁에 있어서 선비들의 추향이 분열되어 비호하고 억제함이 모두 한쪽에 치우쳤으나, 그는 능히 은혜와 의리를 헤아려 정론(正論)을 저술하여 백세(百世)의 공안(公案)이 되기에 충분했다. 『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21년 2월 5일(정유)조 기사에 「박세채 졸기」가 있다. 그가 서울 마포 현석(玄石)에 거주하였을 때는 학자들이 그를 현석선생(玄石先生)이라 일컬었고, 나중에 파주(坡州)의 남계(南溪)에 거주하였을 때는 그를 남계선생(南溪先生)이라 일컬었다.

시호와 문묘 종향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1764년(영조 40) 6월 28일(기묘) 문묘(文廟)에 종향(從享) 되었고,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 되었으며, 파주(坡州)의 자운서원(紫雲書院), 연안(延安)의 비봉서원(飛鳳書院), 개성(開城)의 오관서원(五冠書院), 나주(羅州)의 반계서원(潘溪書院), 평산(平山)의 구봉서원(九峰書院), 장연(長淵)의 봉양서원(鳳陽書院), 배천(白川)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 되었다. 아들은 박태은(朴泰殷)이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농암집(農巖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백호전서(白湖全書)』
  • 『서계집(西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약천집(藥泉集)』
  • 『연암집(燕巖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남계집(南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