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도감(禮葬都監)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예장도감 |
한글표제 | 예장도감 |
한자표제 | 禮葬都監 |
상위어 | 흉례(凶禮) |
동의어 | 예장청(禮葬廳) |
관련어 | 빈궁도감(殯宮都監), 혼궁도감(魂宮都監)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강문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예장도감(禮葬都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8년 1월 11일, 『세종실록』 1년 12월 27일, 『세종실록』 6년 2월 25일, 『세조실록』 3년 11월 8일, 『세종실록』 6년 11월 2일, 『문종실록』 2년 4월 2일 |
조선시대에 예장(禮葬) 절차의 준비와 시행을 주관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기관.
개설
예장은 세자와 세자빈, 왕비의 부모, 빈(嬪)과 귀인(貴人), 대군(大君)·왕자군(王子君) 및 그 부인, 공주, 의빈(儀賓), 종친 종2품 이상, 문무관 종1품 이상, 공신 등의 장례를 가리키는 말로, 국왕과 왕비의 장례인 국장(國葬)보다 한 등급 아래였다. 예장도감은 이와 같은 예장의 준비와 진행을 주관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18년(태종 18) 1월의 실록 기사에는 종친 이하의 예장에는 무덤방인 석실(石室)을 없애고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회격(灰隔)을 쓰도록 할 것을 명한 내용이 있어서, 조선 초기부터 종친 이하의 장례에 ‘예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태종실록』 18년 1월 11일). 하지만 1419년(세종 1) 12월에는 상왕으로 서거한 정종(定宗)의 장례를 위해 예장도감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당시까지 국가 전례의 정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함에 따라 국장과 예장의 구분이 불분명했던 상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세종실록』 1년 12월 27일).
1424년(세종 6) 2월 예조에서는, 기존에 왕자·왕녀의 초상에 염빈(斂殯)·국장(國葬)·조묘(造墓) 등 세 도감을 설치했으나 ‘국장’이라는 이름에 혐의가 있으므로 지금부터는 염빈도감을 혁파하고 그 나머지 여러 일은 예장도감에서 맡도록 할 것을 건의하여 세종의 재가를 받았다(『세종실록』 6년 2월 25일). 이후로는 세조대에 왕세자의 상에 국장도감이 설치되었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세조실록』 3년 11월 8일), 대체적으로 세종 초반 이후 왕자·왕녀의 장례를 국왕·왕비의 국장과 구분하여 예장으로 규정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예장도감은 세자·세자빈·왕자·왕녀 등 왕실 인물들과 종친 및 고위 대신들의 장례를 주관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1424년(세종 6) 11월에 이조에서는 예장도감에 제조(提調) 1인, 사(使) 2인, 부사(副使) 2인, 판관(判官) 2인을 오랫동안 전문으로 담당하게 하고, 만일 예장이 중첩되면 사 이하의 관원들을 추가 임명했다가 일이 끝나면 원래대로 환원할 것을 건의했고, 세종이 이를 수용하였다(『세종실록』 6년 11월 2일). 이와 같은 예장도감의 조직은 문종대에 이르러 일부 변동되었다. 즉 당시 이조에서는 예장도감에 소속된 사·부사·판관 등 도합 6명 중에서 3명을 도태시켰다가 나중에 일이 있으면 추가로 임명할 것을 건의하여 문종의 재가를 받았다(『문종실록』 2년 4월 2일). 이러한 예장도감의 조직은 조선후기 세자·세자빈의 장례 과정을 담은 『예장도감의궤』에 기록된 도감의 조직과는 차이를 보인다. 즉 왕실의 예장에 비해 도감의 규모가 상당히 작았고, 또 일정 부분은 상설화되어 있으면서 장례가 발생하는 경우 인원을 추가하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서 거론된 예장도감의 조직은 아마도 왕실 인물보다는 종친과 문무 대신들의 장례를 위한 예장도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왕실 인물들의 장례를 주관한 예장도감의 조직은 조선후기에 편찬된 『예장도감의궤』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30년(순조 30)에 거행된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예장 과정을 기록한 『효명세자예장도감의궤』의 내용을 기준으로 예장도감의 조직과 역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예장도감의 조직은 크게 도청(都廳)과 1·2·3방(房)으로 구성되었다. 도청은 예장도감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곳으로, 도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서라고 할 수 있다. 도청에는 일반적으로 총호사(總護使), 제조, 도청(都廳), 낭청(郎廳), 감조관(監造官) 등의 관원들이 배치되어 업무를 담당하였다.
1방은 주로 운송수단의 제작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시신을 모시고 가는 큰 상여인 대여(大輿), 작은 상여인 견여(肩輿)와 외재궁여(外梓宮輿), 신주와 혼백 등을 모시는 가마인 신여(神輦)·신백요여(神帛腰輿) 등을 비롯하여 평교자(平轎子), 영좌제구(靈座諸具), 각종 신주를 모시고 돌아올 때 태우는 요여(腰輿)와 각종 귀중품을 싣는 채여(彩輿), 향로 등을 받쳐 드는 향정자(香亭子), 윤여차자(輪輿車子) 등의 제작을 담당하였다. 낭청과 감조관이 실무를 담당했으며, 그 밖에 서리(書吏)·서원(書員)·고직(庫直)·사령(使令)·수직군사(守直軍士) 등의 역원(役員)들도 배속되었다.
2방에서는 길의장(吉儀仗), 흉의장(凶儀仗), 복완(服玩), 명기(明器), 악기(樂器), 포연(鋪筵) 등의 의장과 무덤에 함께 부장할 장신구 등의 제작·조달을 담당하였다. 또 예장에서 소용되는 돗자리와 비 올 때를 대비하여 두꺼운 기름종이인 유둔(油芚)과 우비(雨備) 등을 조달하는 분장흥고(分長興庫)도 2방에 소속되었다. 2방에 배속된 관원 및 역원은 1방의 경우와 기본적으로 같고, 여기에 분장흥고를 담당한 인원이 추가되었다.
3방에서는 시책(諡册), 시보(諡寶), 애책(哀册), 증옥(贈玉), 증백(贈帛), 삽선(翣扇), 만장(輓章), 제기주성(祭器鑄成)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우제(虞祭) 때 쓸 신주인 우주(虞主) 제작에 관한 일을 담당한 우주소(虞主所), 표석과 지석의 제작에 관한 일을 수행하는 표석소(表石所)와 지석소(誌石所), 예장에서 사용되는 각종 차일과 휘장에 관한 일을 담당한 분전설사(分典設司) 등도 3방에 소속되었다. 배속된 관원 및 역원은 1방의 경우와 기본적으로 같고, 여기에 우주소·표석소·지석소·분전설사의 업무를 맡은 인원이 추가되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續五禮儀)』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禮)』
- 『효명세자장례도감의궤(孝明世子葬禮都監儀軌)』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3)』,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