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새(國璽)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0일 (일) 02:20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고대부터 사용해 온 국가의 상징이자 최고 통치자의 인장.

개설

국가 최고 통치자의 인장(印章)은 삼국시대에는 대보(大寶), 국새(國璽), 고려시대에는 국새, 국인(國印), 어보(御寶), 새보(璽寶) 등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위의 용어는 물론 새(璽)와 보(寶)를 왕실 인장의 대명사로 사용하였으나 ‘국새’와 ‘대보’만은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의 용어로 국한하였다. 조선시대의 국새는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며 주로 외교 문서에 사용하였다. 또한 왕위를 계승할 때에는 선양의 징표로 전수하였으며, 국왕의 각종 행차에 행렬의 앞에서 봉송하였다.

내용 및 특징

동아시아에서 제왕을 상징하는 인장에는 주로 ‘새’와 ‘보’를 썼다. 선진시대(先秦時代)에는 관인과 사인을 모두 ‘새’라 하였으나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고 전국새(傳國璽)를 제작하면서 ‘새’는 천자만이 쓰고, 신하나 관리는 ‘인(印)’과 ‘장(章)’으로 구별한 뒤부터 ‘새’가 제왕 인장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부터 제왕은 하늘의 명을 받아 임명된다고 여겼으므로 제왕의 인장을 ‘수명새(受命璽)’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진시황이 화씨벽(和氏璧)이라는 귀한 옥을 얻어 ‘수명어천(受命於天) 기수영창(旣壽永昌)’ 여덟 글자를 새겨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지금도 국새를 ‘옥새(玉璽)’라 부르는 이유 또한 화씨벽으로 제작된 수명새의 전통이 면면히 전해진 결과로 여겨진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국새의 전통은 바로 진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당(唐)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새’의 발음이 ‘사(死)’와 비슷하다는 점을 꼬집어 ‘보’로 고치고 난 후 송(宋)·원(元) 이래로 명(明)·청(淸)대까지 ‘새’와 ‘보’가 제왕 인장의 명칭으로 병용되었고, 두 글자를 합하여 ‘새보’ 혹은 ‘보새(寶璽)’ 등 합성어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변천

1. 고대

우리나라 국새의 기원에 대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 남해왕 16년(서기 19)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濊王之印]을 주워 (임금께)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인장은 실물이 전하지 않아 그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예맥으로부터 부여와 고구려가 갈려 나왔다고 한다면 적어도 문헌상에 보이는 우리 민족의 국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 후 고구려에 관한 기사에도 새로운 국왕을 맞이하기 위해 고구려 신하들이 국새를 올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국새의 전수를 통한 왕위 선양의 전통이 이미 고구려 때부터 있었음을 시사한다.

2. 고려시대

고려는 475년간 거란·요(遼)·금(金)·원·명으로부터 인장을 받았다. 중국으로부터 인수한 국왕의 인장은 책봉의 관계를 의미한다. 책봉은 한(漢) 이래 중국의 이민족 국가에 대한 지배 방식의 하나로, 황제가 주변 국가의 통치자에게 특정한 관작과 이에 상응하는 물품을 주어 자격과 지위를 부여하고 공인하는 제도이다.

고려도 여러 번 교체된 중국의 국가들을 대국으로 대우하고, 이소사대(以小事大) 즉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긴다’라는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 관행을 따랐다. 사대와 책봉은 단순한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 사회의 역학 관계를 여실히 반영하는 것이었다. 고려 국왕이 책봉과 함께 받은 인장은 국새를 의미한다. 사료에는 인문(印文)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고려 국왕’을 의미하는 문구였으리라 추측된다.

손잡이의 모양은 명종 때의 낙타, 공민왕 때의 거북이로 두 종류가 나타난다. 낙타 모양 손잡이는 삼국시대 이전과 고구려의 책봉인(冊封印)에서 이미 나타나며, 고대로부터 중국을 중심으로 동북방 민족에게 반사된 손잡이의 형식이다. 거북이는 주로 신하의 도리를 상징하므로 사대와 책봉의 관계를 손잡이의 형상에 반영하였다고 풀이되며,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국새는 대부분 명·청의 황제들에 의해 책봉과 동시에 사여(賜與)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의 국새를 명나라에 반납하고 새 국새를 내려 주기를 여러 차례 요청하였으나 태조 당대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건국 이후 명으로부터 국새를 받기 이전 약 10년간 조선에서는 ‘조선왕보(朝鮮王寶)’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명과 인신을 받은 시점은 개국 이후 10년이 지난 1401년(태종 1) 6월이었고, 명에서 책봉한 공식 명칭은 ‘조선 국왕’으로 인문 또한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었다. 이 국새는 인조 때까지 주로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에 사용하였고, 청나라가 들어서기 이전 두 차례 더 인수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명나라에서 받은 국새는 총 3과이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에서 받은 국새를 사용하였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국가로, 그들의 문자인 만주 문자를 사용하였다. 청나라로부터 처음 받은 국새에는 만주 문자가 새겨져 있고, 이후 한자와 만주 문자를 병용한 국새를 받았다.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청나라에서도 총 3차례 국새를 인수하였으므로, 조선시대 명·청으로부터 받은 국새는 총 6과가 되는 셈이다.

한편 조선초기에는 국왕 문서에 사용할 국새의 대체 어보인 ‘신보’와 ‘행보’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인문은 각각 ‘국왕신보(國王信寶)’·‘국왕행보(國王行寶)’이며, 이 두 어보로부터 조선시대 국왕 문서용 어보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신보는 사신(事神)·사유(赦宥)·공거(貢擧)에, 행보는 책봉·제수(除授) 등에 사용하였다. 신보와 행보는 고려에서도 사용하였으며, 중국 새보의 제도에 연원을 두었다.

4. 대한제국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조선은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끝내면서 종전의 책봉에 의한 국새 인수 제도를 폐지하고 국내에서 국새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1881년(고종 18) 고종은 일본에 신사(信使)가 가지고 가는 국서(國書)에 기존에 사용하던 ‘위정이덕보(爲政以德寶)’ 대신에 ‘대조선국보(大朝鮮國寶)’를 제작하여 쓰라는 명령을 내렸다. 갑오경장을 즈음하여 조선에서는 이 국새 외에도 ‘대조선국대군주보(大朝鮮國大君主寶)’(1882. 7. 1 제작), ‘대군주보(大君主寶)’(1882. 7. 1 제작),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1876. 12. 15 제작)를 제작하여 외국에 보내는 국서에 사용하였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직후 조선에서는 황제 즉위를 요청하는 상소가 조야 각계로부터 쇄도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의 위압을 받아 정해졌던 건양(建陽)이란 연호를 광무(光武)로 변경하고, 10월 초에는 마침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곧이어 국명을 ‘대한(大韓)’으로 변경함으로써 505년간 지속된 조선 왕조는 종언을 고하였고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황제의 나라에 걸맞은 새로운 인장을 제작하였다. 이때 제작한 국새와 어보는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3과, ‘칙명지보(勅命之寶)’ 2과,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命之寶)’로 총 9과이다. 이 가운데 ‘대한국새’만이 외교 문서에 사용하는 공식적 국새이고 다른 인장들은 모두 국내용 행정 문서에 사용되는 어보에 해당한다.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외에도 ‘군주어새(君主御璽)’와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비밀 국새가 있었다. ‘군주어새’는 대한제국 선포 직전인 1897년 9월 프랑스와 독일에 양국의 우호 증진과 상호 협조를 구하는 내용의 친서에 찍혀 있으며,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 필름으로 남아 있다.

‘황제어새’는 고종황제가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대한제국 시기에 러시아, 이탈리아 등 각국에 일본을 견제하고 대한제국의 지지를 요청하는 친서에 사용한 인장이다. ‘황제어새’의 존재는 문서와 사진으로만 전해지고 있었는데, 2009년 3월 한 재미 교포로부터 국립고궁박물관이 입수하여 실물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국새는 사방 5.3㎝로 근대화된 문서 양식에 맞추어 기존의 새보보다 약 절반 정도 작게 제작되었다. 재질은 비파괴 검사 결과 거북 인뉴(印鈕)의 금과 은의 비율이 약 81:18, 인판(印版)이 57:41의 비율로 따로 제작하여 붙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황제어새는 풍전등화와 같은 대한제국의 운명 앞에서 공식적인 국새를 사용할 수 없었던 고종이 비밀리에 제작하여 사용한 국새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대한제국 시기에 제작된 새보 중 일부는 한일 합방 당시 약탈당하여 일본궁내성에 보관되었는데, 미 군정 당국이 되찾아와 1946년 8월 15일에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반환하였다. 그 후 1965년 3월 대한국새와 황제사보 등 5점을 유실하였으며, 현재 남아 있는 국새는 새로 발견된 ‘황제어새’ 1점뿐이다. 어보로는 ‘선사지기(宣賜之記)’(성암고서박물관), ‘칙명지보’(국립중앙박물관), ‘제고지보’(국립전주박물관), ‘대원수보(大元帥寶)’(국립전주박물관)만이 현존한다.

참고문헌

  •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
  •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
  • 『이조새보인압부신제(李朝璽寶印押符信制)』(李王職 寫)
  • 김양동, 『한국의 인장』, 국립민속박물관, 1987.
  • 이종일 역주, 『대전회통연구-호전·예전편-』, 한국법제연구원, 2002.
  • 이선홍, 「조선시대 대중국 외교문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 徐啓憲, 『明淸帝后寶璽』, 紫禁城出版社, 1994.
  • 葉其峰, 『古璽印通論』, 紫禁城出版社, 200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