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지기(宣賜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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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내사본(內賜本) 서적에 사용된 어보.

개설

조선시대에는 왕명으로 서적을 반사(頒賜)할 때 표지 뒷면에 내사기(內賜記)를 작성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인장으로 어보를 사용하였다. 내사기에는 왕이 반사한 서적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누구에게 무슨 책을 몇 권 반사하였는지 따위의 내용을 기록한다. 이러한 내사기에 더하여 권수(卷首)에 어보를 찍음으로써 사실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 바로 내사인(內賜印)이다.

조선시대 서적 반사 때 사용하였던 어보는 선사지기(宣賜之記)와 규장지보(奎章之寶)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밖에도 흠문지보(欽文之寶)·동문지보(同文之寶)·선황단보(宣貺端輔) 등이 있었다. 어쩌다가 어보가 아닌 승정원인(承政院印) 따위의 관인(官印)이 보이기도 한다. 대한제국 때에는 흠문지새(欽文之璽)가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반사본(頒賜本)은 왕의 명으로 내려준 책이다.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 또는 규장각 각신이 특정의 신료, 관원 및 관서, 사고, 향교, 서원 등에 반사하였다. 왕의 하사품이므로 책의 지질이나 장정, 인쇄 상태가 양호하고, 본문의 교정이 철저하여 오자와 탈자가 거의 없다. 특히 관주활자(官鑄活字)로 찍은 반사본은 동양 3국 중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의 하나이다. 또한 책을 받은 후손들은 왕이 조상에게 내려 준 하사품이므로 가문의 명예로 여겨 오늘까지 간직해 왔으므로 귀중한 전적 문화유산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반사본은 일반적으로 표지 안쪽 면에 반사에 관한 기록인 내사기를 쓰고, 내용의 시작부에 어보를 찍는다. 내사기의 형식은 개인의 경우 첫째 줄에 반사 연월일을 쓰고, 둘째 줄은 첫 줄의 수자(首字)보다 한 자 올린 상일자(上一字) 또는 두 자 올린 상이자(上二字)의 형식으로 ‘내사(內賜)’의 용어를 쓴 다음 반사를 받는 이의 직함·성명·서명 1건의 차례로 쓴다. 끝줄 아래에 왕의 명을 받들어 내려 주는 승정원 승지의 직함과 신(臣)에 이어 성을 쓰고 수결(手決)한다.

문장의 끝에 ‘명제사은(命除謝恩)’이라는 문구가 있는 경우가 있는데, ‘왕이 베풀어 준 은혜에 대한 인사는 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으로 일일이 인사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명문화하였다. 단체는 개인의 경우와 같은 차례로 쓰되, ‘명제사은’만 생략하는 원칙이 있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내사’ 다음에 반사 책명과 보낸 관서 명에 이어 ‘상(上)’을 표시하기도 하고, 더욱 간략하게 쓴 경우는 반사 연월일과 보낸 곳의 관서 명에 이어 ‘상’만 쓰기도 한다.

왕명에 따라 도서를 반사하는 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문헌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전한다. 1045년(고려 정종 11) 비서성(秘書省)에서 새로 간행한 『예기정의(禮記正義)』 70질과 『모시정의(毛詩正義)』 40질을 바치니, 왕이 어서각(御書閣)에 한 질씩만 보관하고 나머지는 문신들에게 반사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활자본을 중심으로 빈번하게 서적을 반사하였다.

조선시대 내사인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 기사에서 처음 볼 수 있다. 1429년(세종 11) 3월 26일자 기사를 보면, “경연에 소장한 책은 표기(標記)가 없을 수 없으니, ‘경연(經筵)’ 두 글자의 도서(圖書)를 만들어 매 권마다 이를 찍게 하고, 또 ‘내사’ 두 글자의 도서를 만들어 만약 하사하시는 책이 있으면 이 도서를 찍어 내리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1년 3월 26일). 따라서 이때부터 내사본에 ‘내사’라는 인장을 찍게 되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 가람문고에 소장된 『서산선생진문충공문장정종(西山先生眞文忠公文章正宗)』에서 이 인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1429년 8월에 경자자(庚子字)로 인쇄하였으며, ‘경연’과 ‘내사’의 두 인장이 찍혀 있다. 『세종실록』의 기사보다 약 5개월 뒤에 인쇄하였으므로 기사의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경연’은 사방 3.9㎝의 정방형, ‘내사’는 세로 3.7㎝, 가로 1.9㎝의 장방형 인장이다. 조선후기 내사본에서는 볼 수 없는 인장으로, 조선초기에 경연 소장용 서적에 잠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로 서적을 반사할 때 사용한 어보는 선사지기·선황단보(宣貺端輔)·동문지보(同文之寶)·규장지보(奎章之寶)·흠문지보(欽文之寶) 등이 있었으며, 이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사용한 어보가 선사지기이다. 서적 반사 때 선사보(宣賜寶)를 안보하기 시작한 시점은 세종대이다. 세종대 이전에도 선사인(宣賜印)이 있었으나 내사인이 아닌, 주로 녹패(祿牌)에 사용하였다.

1403년(태종 3) “선사지인(宣賜之印)이 국새보다 더 크다.”는 기록을 통해 조선초기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1432년(세종 14) 동반과 서반 각 품의 녹과에 사용하는 선사지인의 용도에 대해 논의한 기사가 있다. 선사지인의 안보 사례로는 1394년(태조 3) 간행한 「도응녹패(都膺祿牌)」(보물 제724-5호)가 있는데, ‘선사지인’ 3방이 찍혀 있다. 서체는 7첩의 첩전(疊篆)으로 크기는 10.1㎝이다.

1440년(세종 22) 8월 승정원에서는 주자소에서 모인(模印)한 서적을 각 품계에 따라 반사하였는데, 받은 자가 장황(粧潢)을 게을리 하여 훼손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세종은 서적을 받은 지 3개월 이내에 제본하고 승정원에 제출하여 선사지기를 받도록 하고, 이를 영구한 법식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후로 조선시대 서적 반사에 가장 많은 사용 빈도를 보이고 있는 어보가 바로 선사지기이다.

선사지기가 사용된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는 1437년(세종 19) 초주 갑인자로 간행된 『역대장감박의(歷代將鑑薄議)』로, 현재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간행된 서적으로는 1447년(세종 29) 10월에 반사한 목판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1448년(세종 30) 10월에 반사한 『동국정운(東國正韻)』 활자본이 있다. 『동국정운』은 1447년 9월 완성하여 간행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고, 이듬해 10월 성균관·사부학당 등에 보급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간행 시기와 보급 시기를 알 수 있다. 현재 전 6권 가운데 1권과 6권만이 남아 있다. 내용을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목활자이고,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이다. 본문의 큰 글자는 진양대군(晋陽大君, 뒤의 세조)의 글씨로 전한다. 책 1면 변란의 안쪽 구석에는 세종대에 제작한 선사지기가 있어 반사본임을 말해 준다.

형태

선사지기는 인조반정으로 잃어버렸다가 1624년(인조 2) 한 차례 개주하였다. 이때 개주한 선사지기는 1675년(숙종 1) 홍주국(洪柱國)에게 반사한 『고사촬요(故事撮要)』에서 확인할 수 있다. 8㎝의 주문방인(朱文方印)으로 종전의 것을 모방하여 제작한 듯하나 보문의 서체가 약간의 차이를 보이며, 변곽이 두꺼워졌다.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를 통해 1876년(고종 13) 12월 28일 한 차례 마련취색(鍊磨取色)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인소의궤』에 따르면 개주한 선사지기의 재질은 은이며, 인꼭지는 직뉴(直鈕)이다. 인면의 길이는 방 8㎝(2촌 9푼), 곽광(郭廣)은 2.7㎜(1푼), 직뉴의 높이는 5.24㎝(1촌 9푼), 두께는 2.2㎝(8푼)이다. 직뉴의 중앙에는 횡혈(橫穴)이 있으며 서체는 소전(小篆)이다.

현존하는 선사지기는 성암고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재질은 무게로 보아 은이 아니므로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도금한 어보를 금으로 기재하거나, 주석 합금을 은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남은 선사지기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국왕 문서를 포함한 서적 반사용 어보로 현존하는 유일한 유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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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村榮孝, 「朝鮮官板の內賜記と國王印にいいて」, 『韓國學報』25,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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