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지보(同文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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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에 고종의 명으로 서적을 반사하기 위해 제작한 국새.

개설

동문지보(同文之寶)는 개화기에 고종의 명으로 서적의 반사(頒賜)를 위해 제작한 국새이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기에는 왕이 반사하는 서적 및 여타 하사 물품에 찍기 위한 국새를 제작하였다. 반사본(頒賜本)은 국왕의 명으로 내려준 책으로 내사본(內賜本)이라고도 한다. 승정원 승지 또는 규장각 각신(閣臣)이 특정의 신료, 관원 및 관서, 사고, 향교, 서원 등에 반사하였다. 국왕의 하사품이므로 서적의 지질이나 장정, 인쇄 상태가 양호하고, 본문의 교정이 철저하여 오자와 탈자가 거의 없다. 특히 관주활자(官鑄活字)로 찍은 반사본은 동양 삼국 중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의 하나이다.

연원 및 변천

개화기를 전후하여 조선은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끝내면서 종전의 책봉에 의한 국새인수제도를 폐지하고 이를 국내에서 자체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1876년(고종 13)에는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를 제작하였고, 1881년(고종 18)에는 기존의 이덕지보(以德之寶)를 쓰지 말고, 대조선국보(大朝鮮國寶)를 제작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18년 윤7월 27일). 1889년(고종 26)에는 준명지보(濬明之寶), 동문지보, 흠문지보(欽文之寶) 등을 새로 제작하였다(『고종실록』 26년 8월 5일). 대조선국주상지보와 대조선국보 등은 일본과 관련한 국서(國書)에 찍기 위해 제작한 국새이며, 준명지보는 춘방교지(春坊敎旨)에, 동문지보·흠문지보는 서적 반사에 쓰였다.

조선시대에 서적 반사를 위해 사용한 국새는 선사지기(宣賜之記)·선황단보(宣貺端輔)·동문지보·규장지보(奎章之寶)·흠문지보 등이 있었으며, 가장 이른 시기에 사용한 국새는 선사지기이다. 서적을 반사할 때 선사지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은 세종대이다. 1440년(세종 22) 8월 승정원에서는 주자소(鑄字所)에서 모인(模印)한 서적을 각 품계에 따라 반사하였는데, 받은 자가 장황(粧潢)을 게을리 하여 훼손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세종은 반사 받은 지 3개월 이내에 제본하고 승정원에 제출하여 선사지기를 받도록 하고, 이를 영구한 법식으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세종실록』 22년 8월 10일).

서적의 반사는 세종대로부터 줄곧 승정원에서 담당하였으나 1776년(정조 원년)에 규장각이 설치되면서 그 기능이 옮겨져 직각(直閣), 대교(待敎) 등의 각신이 맡았다. 이에 따라 국새도 선사지기 위주에서 규장지보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 두 국새 외에도 동문지보·선황단보·흠문지보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1779년(정조 3) 1월부터 1883년(고종 20) 2월까지의 규장각 일기인 『내각일력(內閣日曆)』에는 서적반사를 위해 규장지보를 내어줄 것을 요청한 계(啓)가 150여 건에 이르는 반면 동문지보는 2건, 선사지기나 흠문지보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흠문지보를 서적반사시에 사용한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소수 보인다. 따라서 18~19세기 반사본에는 주로 규장지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내사본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선사지기 15종, 규장지보 51종, 동문지보 6종, 흠문지보 1종, 국새가 없는 사례가 2종으로 나타나 규장지보가 주류를 이루었음을 밝혔다.

형태

동문지보의 재질은 천은도금(天銀鍍金)이며, 손잡이는 거북뉴[龜鈕]이다. 인면의 넓이는 8.8×8.8㎝이다. 보문은 소전(小篆)으로 ‘동문지보’ 4자를 양각하였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
  • 성인근, 『고종 황제 비밀 국새』, 소와당, 2010.
  • 성인근, 『한국인장사』, 다운샘, 2013.
  • 강순애, 「奎章閣의 圖書頒賜에 관한 硏究」, 『季刊 書誌學報』창간호, 한국서지학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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