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문지보(欽文之寶)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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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흠문지보 |
한글표제 | 흠문지보 |
한자표제 | 欽文之寶 |
상위어 | 내사본(內賜本), 반사본(頒賜本), 어보(御寶) |
관련어 | 규장지보(奎章之寶), 내사기(內賜記), 내사인(內賜印), 동문지보(同文之寶), 선사지기(宣賜之記), 선황단보(宣貺端輔), 흠문지새(欽文之璽) |
분야 | 교육·출판/출판/인장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고종 |
집필자 | 성인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흠문지보(欽文之寶)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 26년 8월 5일 |
내사본을 반사할 때 사용한 어보.
내용
흠문지보(欽文之寶)는 내사본(內賜本)을 반사(頒賜)할 때 사용하는 여러 어보(御寶) 가운데 하나이다. 서적을 반사할 때 사용한 어보로는 선사지기(宣賜之記)·선황단보(宣貺端輔)·동문지보(同文之寶)·규장지보(奎章之寶)·흠문지보(欽文之寶)·흠문지새(欽文之璽) 등이 있었다. 세종대부터 선사지기를 사용하였으며, 규장각(奎章閣) 설치 이후에는 주로 규장지보를 사용하였다.
1779년(정조 3) 1월부터 1883년(고종 20) 2월까지의 규장각 일기인 『내각일력(內閣日曆)』에는 서적 반사를 위해 규장지보를 내어줄 것을 요청한 계(啓)가 150여 건에 이르는 한편 동문지보 2건, 선사지기나 흠문지보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흠문지보를 서적 반사시에 사용한 기록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소수 보인다. 따라서 18~19세기 반사본(頒賜本)에는 주로 규장지보를 사용하였음이 확인된다.
흠문지보가 찍혀진 사례로 1866년(고종 3) 간행된 『황명조령(皇明詔令)』이 있다. 이 책은 명 태조에서 세종까지 12대의 조령집이다. 총 10책으로 구성되었고, 1책의 1면에는 반사본임을 확인할 수 있는 흠문지보와 봉모당(奉謨堂)에 소장되었음을 알 수 있는 봉모당인(奉謨堂印)이 찍혀 있다. 어보는 변란의 안쪽 구석이 바른 위치이지만 황제를 나타내는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가 있어 ‘제(帝)’ 자의 아래에 안보하였다.
용례
命造成大朝鮮國寶 濬明之寶 同文之寶 欽文之寶 命德之寶 廣運之寶(『고종실록 』 26년 8월 5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강순애, 「규장각의 도서반사에 관한 연구」, 『계간 서지학보』창간호, 1990.
- 안병희, 「내사본의 한 연구」, 『장서각』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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