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뉴(印鈕)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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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인뉴 |
한글표제 | 인뉴 |
한자표제 | 印鈕 |
동의어 | 뉴(鈕), 인꼭지 |
관련어 | 귀뉴(龜紐), 유식(鈕式), 인장(印章), 인파자(印把子) |
분야 | 교육·출판/출판/인장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성인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인뉴(印鈕) |
인장을 사용할 때 잡는 손잡이.
개설
인뉴(印鈕)는 시대와 신분·용도에 따라 달리 제작되었으며, 이를 제작하는 방식이나 모양을 흔히 유식(鈕式)이라고 한다. 현재 중국에서 권력, 혹은 정권이란 말을 대신하여 ‘인파자(印把子)’란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인뉴에 대한 이른 기록으로 당(唐)의 두우(杜佑)가 『통전(通典)』에서 “삼대의 제도에 인신(人臣)은 모두 금옥(金玉)으로 인(印)을 만들고 용호(龍虎)로써 손잡이를 만들었다[三代之制 人臣皆以金玉爲印 龍虎爲鈕]”고 하여 인장의 기원과 재질, 인뉴의 모양까지 상세히 거론하였다.
유물을 살피면 적어도 동주(東周)에는 인장의 사용이 성행하였지만 비뉴(鼻鈕) 정도가 보일 뿐 아직까지 용뉴(龍鈕)나 호뉴(虎鈕)의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다. 인뉴는 인장을 잡기 위한 손잡이 역할 외에도 수식을 더하여 품격을 높이는 예술적 측면도 지닌다.
내용 및 특징
한반도에서 출토된 가장 이른 시기의 인장으로 낙랑의 사인(私印)이 있다. 이 시기 인장의 손잡이는 거북 형상의 귀뉴(龜紐)와 어떤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수뉴(獸鈕)가 있고, 타원형 손잡이나 손잡이 없이 양면으로 제작된 사례도 있다. 한편 ‘영수강녕(永壽康寧)’이 새겨진 거북 손잡이의 옥제 길어인(吉語印)이 낙랑의 인장에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동한응소(應劭)의 『한구의』에 따르면 “거북이는 음물(陰物)로 때에 따라 몸을 감추어 신하의 도리를 나타낸다. 공(功)이 이루어지면 물러난다[龜者陰物 隨時蟄藏 以示臣道 功成而退也]”고 하여 거북의 성질을 신하의 도리에 비유하였다. 또한 “한대 제후왕(諸侯王), 열후(列侯), 승상(丞相), 장군(將軍), 어사대부(御史大夫), 흉노단우(匈奴單于), 어사(御史), 황태자(皇太子) 등은 모두 귀뉴인(龜鈕印)을 받는다.”고 하였다. 두 기록을 통하여 귀뉴가 갖는 상징성과 이를 지닐 수 있는 신분을 살필 수 있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중원을 중심으로 주변국에 인장이 반사(頒賜)되었는데, 이러한 반사인의 유식은 서남 지방은 주로 뱀 모양의 사뉴(蛇鈕), 남해 지방은 소라 모양의 나뉴(螺鈕), 서방 및 북방은 낙타 모양의 타뉴(駝鈕)로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도 중원으로부터 여러 국새와 관인(官印)을 반사받았다. 유식은 명종대의 타뉴와 공민왕대의 귀뉴가 있다. 타뉴는 삼국시대 이전과 고구려의 책봉인에서 이미 나타나는 유식으로, 고대부터 중원을 중심으로 동북방 이민족에게 반사되었다. 귀뉴는 주로 신하의 도리를 상징하는 거북을 인장에 얹어 사대와 책봉의 관계를 나타내었다고 풀이된다. 재질은 왕과 왕세자의 인장은 모두 금을 사용하였고, 관인은 은과 동을 혼용하였다.
고려시대의 사인은 대부분 청동으로 주조되었으며 하나하나의 손잡이는 당시 공예 문화와 주조 기술의 뛰어난 단면을 보여 준다. 고려시대의 사인은 사자뉴의 비율이 높다. 사자는 고대 예술에서 강력한 힘과 위엄을 상징하는 동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등장하는 소재이다. 불교 관련 건축 부재와 각종 유물에서 사자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려 동인(銅印)에 사자뉴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이유도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 사회와 관련이 깊다. 특히 두 마리의 사자가 인장에 쓰인 쌍사자뉴는 법주사와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을 비롯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불교 미술품에 나타나는 양식과 조형적 상관성을 보이므로 주목된다. 한편 고려의 사인 가운데 견뉴, 기린뉴, 쌍사자공양뉴, 사사자공양뉴, 섬뉴, 원뉴 등은 낮은 비율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와 청나라로부터 국새를 인수하였는데, 유식은 모두 거북이었다. 조선에서 자체 제작한 어보의 경우도 거북 일색이었다. 제후국으로서의 도리를 인장에 얹은 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제국의 지위에 걸맞게 새로 국새와 어보를 제작하였는데, 대부분의 유식은 용이었다. 조선시대의 관인은 대부분 금속으로 제작되었고, 유식은 막대형인 직뉴(直鈕)로 하였다.
중원의 여러 국가에서 사용하던 관인의 유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 익뉴(杙鈕)로 타원형의 곧은 손잡이가 인대(印臺)의 중앙에 위치하며 유체(鈕体)가 비교적 높아 잡고 사용하기가 쉽다. 이러한 인뉴는 전국시대에서 한대에 걸쳐 사용하던 주뉴(柱鈕)와 비슷하나 구멍이 없는 점이 특징이다. 명·청대의 관인에 주로 사용하던 유식이다.
둘째, 주뉴로 구멍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으며, 당송 이래로 길이가 점점 길어져 잡고 사용하기가 편리해졌다. 셋째, 궐뉴(橛鈕)로 주뉴나 익뉴에 비해 높이가 낮으며 구멍이 없다. 양송과 금·원대 관인에 보이는 유식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 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구멍의 유무에 관계없이 직뉴라는 용어를 쓴 사례는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서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임영주, 『한국문양사』, 미진사, 1983.
- 蕭高洪 主編, 『中國歷代印風系列-隋唐宋印風(附遼夏金)-』, 重慶出版社, 1999.
- 新關欽哉, 『ハンコの 文化史』, PHP硏究所, 1987.
- 『中國美術分類全集-中國璽印篆刻全集·璽印』下, 上海書畵出版社,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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