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보(朝鮮王寶)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조선왕보 |
한글표제 | 조선왕보 |
한자표제 | 朝鮮王寶 |
상위어 | 국새(國璽), 새보(璽寶), 인장(印章) |
관련어 | 고명(誥命), 국왕 문서(國王文書), 국왕신보(國王信寶), 국왕행보(國王行寶), 대조선국보(大朝鮮國寶), 대한국새(大韓國璽),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황제지보(皇帝之寶), 군주어새(君主御璽), 황제어새(皇帝御璽), 황제지새(皇帝之璽) |
분야 | 교육·출판/출판/인장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성인근 |
용도 | 국왕 문서 |
재질 | 은제(銀製) 도금(鍍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조선왕보(朝鮮王寶) |
조선에서 명나라와의 책봉 관계 이전에 제작하여 약 10년간 사용한 국새.
개설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는 중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중원을 석권한 세력은 이 지역의 패권자로서 주변국과의 책봉 관계를 통해 중국적 세계 질서를 형성하였다. 주변국들은 황제의 승인을 얻어야만 동아시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선진 문물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정치적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황제가 주변국의 왕을 승인하는 징표는 임명장에 해당하는 고명(誥命)과 인장인 국새이다. 조선시대에는 명과 청으로부터 각각 3차례 국새를 받았다. 그러나 명나라로부터 처음 국새를 받기 이전 약 10년간은 조선에서 자체 제작한 ‘조선왕보(朝鮮王寶)’를 사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에서 명나라로부터 처음 국새를 받기 이전 국내에서 국새를 자체 제작하여 사용한 사실은 『영조실록』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기사에는 “상산부원군강순룡(康舜龍)의 후손 강치경(康致慶)이 태조의 어필 교지를 왕께 올렸다. 왕이 말하기를, ‘이 교지 가운데 인전(印篆)을 보고 그 연월을 상고하니 바로 성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초기였다. 병자호란 이후에 청국의 보(寶)를 사용하였고, 지난번에 상신 이이명(李頤命)의 주달로 비로소 괴원에 해창위가 모방하여 주조한 황조의 인(印)이 있음을 알았다. 지금 조선왕보의 전문(篆文)을 보니 또한 기이하다. 지금은 조신(朝臣)의 교지에 모두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유래가 이미 오래다. 이를 비록 고칠 수 없다 하더라도 이미 보전(寶篆)을 보았으니 어찌 없애겠는가? 국가의 교명과 왕후, 왕세자의 책례 때에는 마땅히 이를 사용하여야 하겠다’고 하고, 상방(尙方)에 명하여 이를 모방하여 주조해서 바치게 하였다.”고 하였다.
조선초기의 문헌 기록에는 이 국새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위 기록을 통하여 건국 초에 명으로부터 국새를 인수하기 이전 조선왕보를 안보(安寶)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위 기사에서 언급한 「강순룡왕지(康舜龍王旨)」는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문서에 안보한 조선왕보의 크기는 사방 11㎝로, 네 글자를 2자 2항으로 배치하였고, 서체는 주문첩전(朱文疊篆)이다.
안보 위치는 연호와 연월의 중간 지점에 국새의 윗선을 맞추었다. 이 인장은 조선시대에 국내에서 제작한 유일한 국새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고려 국새의 안보 사례가 전무한 시점에서 태조 대에 제작된 국새이므로 크기, 서체, 안보 위치 등 고려의 유제를 실물을 통해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전근대에는 인장에 사용하는 글자에 엄격한 구분을 두어 제후국인 조선에서는 국새에 ‘새(璽)’ 자나 ‘보’ 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명·청으로부터 받은 공식적 국새는 모두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으로 ‘인’ 자를 사용하였고, 인꼭지는 신하의 도리를 상징하는 거북으로 되어 있다. 태조대에 조선에서 자체 제작한 조선왕보는 명과의 책봉 관계 형성 이전에 나타난 하나의 특수한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 이전 조선시대의 국새는 대부분 명·청의 황제들이 책봉과 동시에 내려 주었고, 어보는 국내에서 제작하였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의 국새를 명에 반납하고 새로 내려 주기를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그러나 태조 당대에는 실현되지 않다가, 태종대에 금제(金製) 조선국왕지인을 받았다. 이 국새는 인조대까지 주로 명과의 외교문서에 사용하였고, 이후 두 차례 더 인수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에서 내려 준 국새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숙종 대에 명나라에서 준 옛 국새의 자취를 찾아 별도로 모조하여 비장해 두고 왕위 계승에만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실 인사의 위호(位號)를 나타낸 어보 이외에 각종 국왕 문서와 서적 반사(頒賜)를 위한 인장을 사용하였다. 명으로부터 제후국으로 책봉되면서 함께 받은 국새는 모든 국사와 관련한 문건에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우선 금제이므로 쉽게 닳아 인문이 만환(漫漶)될 우려가 있었고, 국내용 문서에 ‘조선국왕’이라 새긴 보문이 격에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이유로 세종 대부터 중원의 제도를 모방하여 국새를 대체할 국왕신보(國王信寶)와 국왕행보(國王行寶)를 제작하여 국왕 문서에 사용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국왕 문서용 어보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형태
조선왕보는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영조가 교명과 왕후, 왕세자의 책례에 사용하기 위해 모방하여 주조한 이후, 1876년(고종 13) 12월 다시 한 번 개주하였다. 이때 개주한 조선왕보의 재질은 은제(銀製) 도금이고, 유식(鈕式)은 거북 모양이다. 크기는 사방 12.6㎝(4촌 4푼)로 본래의 크기보다 약 1.6㎝ 크게 제작하였다. 서체는 첩전으로 개국 초에 사용한 조선왕보를 그대로 모방하였다.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에는 이 국새의 관련 물품인 보통(寶筒) 1부, 보록(寶盝) 1부, 호갑(護匣) 1척에 대한 도설과 함께 크기·재질·용도·소요 물자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편, 『보인소의궤』, 학연문화사, 200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