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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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로부터 받은 국새.

개설

전근대에는 인장에 사용하는 글자에 엄격한 구분을 두어 제후국인 조선에서는 국새에 ‘새(璽)’나 ‘보(寶)’ 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명·청으로부터 받은 공식적 국새는 모두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으로 ‘인(印)’ 자를 사용하였고, 인꼭지는 신하의 도리를 상징하는 거북으로 되어 있다.

연원 및 변천

개국 이전부터 친명 노선을 추구하던 태조이성계(李成桂)는 즉위 이듬해인 1393년(태조 2) 이념(李恬)을 명에 보내 고려의 국새를 반납하였고, 2년 뒤인 1395년 태학사정총(鄭摠)을 파견하여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명에서는 주청문의 내용과 표현이 공손하지 못하다고 트집을 잡아 거절하였다.

1398년 태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종 또한 친명 정책을 추진하여, 1400년(정종 2) 9월 판삼사사우인열(禹仁烈)과 첨서이문화(李文和)를 명에 보내어 고명과 인신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 건문제(建文帝)는 고명과 인신을 보내고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정종이 갑자기 왕위를 아우에게 양위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건문제는 조선의 내부 사정에 의심을 가지고 조선으로 가던 사신을 중도에 불러들임으로써 정종도 명으로부터 고명과 인신을 받지 못하였다.

결국 조선이 처음으로 고명과 인신을 받은 때는 개국 이후 10년이 지난 1401년(태종 1) 6월이었고, 명에서 책봉한 공식 명칭은 조선국왕(朝鮮國王)으로 인문 또한 ‘조선국왕지인’이었다. 이후 명으로부터 두 차례 국새를 받았으나 인문, 서체, 포치 등이 모두 이전과 같았다.

1401년 처음으로 고명과 인신을 받은 이후 명에서는 건문제가 삼촌 영락제와 3년간 싸우다가 결국 패배하여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건문제의 뒤를 이어 영락제(永樂帝)가 3대 황제에 올랐다. 명나라에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였음을 계기로 태종은 영락제에게 하륜(河崙)을 보내 축하의 뜻을 표함과 아울러 새로운 고명과 인신을 요청하였고, 영락제는 곧바로 고명과 인신을 내주었다. 하륜이 이를 가지고 한양에 도착했을 때가 1403년(태종 3) 4월이었다. 이를 계기로 태종은 1401년 건문제에게서 받은 고명과 국새를 1403년 4월 21일 명나라에 반납하였다.

새로운 고명과 인신을 받은 태종은 왕권 안정에 많은 도움을 받은 동시에 등극 과정에 약점을 갖고 있던 영락제도 태종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로부터 조선시대의 대명 사대 외교가 정착하였으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도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인수한 국새는 금제귀뉴(金製龜鈕)로, 동북의 제후국 책봉 때 재질은 금으로 하며 손잡이는 거북 모양으로 하는 한제(漢制)를 따랐다고 하였다. 세 번째 국새는 명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국새로 성화 연간(1465~1487)에 인수하였다.

중원에 청이 들어서면서 조선에서는 모두 3차에 걸쳐 국새를 인수하였다. 첫 번째는 1637년(인조 15) 11월 청자(淸字, 만주어)로 새긴 국새였다. 두 번째는 1653년(효종 4)에 인수하였으며, ‘조선국왕지인’을 한자와 청자로 하나의 인장에 새겨 넣었다. 한자는 소전이며 청자는 아직 전서화되지 않았다. 세 번째는 1776년(영조 52)에 인수하였으며, 한자와 청자가 모두 전서로 지영전(芝英篆)으로 하였음이 특징이다.

세 번째 국새를 인수하기에 앞서 청에서는 태학사부항의 건의에 따라 청 외의 모든 인신은 청서한자(淸書漢字), 즉 청자와 한자를 모두 전자로 제작하여 다시 주조하기로 하였다. 다시 말해 조선을 포함한 제후국의 국새를 해당 국가의 왕이 왕위를 승습할 때 청에서 회수하고 새로 주조하여 발급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1776년 청에서 보낸 세 번째 국새에는 한자와 청자가 모두 전서의 일종인 지영전으로 되어 있다. 앞의 1653년 효종 연간에 받은 국새의 형상과 달라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편, 『보인소의궤』, 학연문화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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