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열의(大閱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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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이 직접 참관한 대규모 열병(閱兵) 의례.

개설

장수와 군사들이 진법을 연습하고 전투 훈련 하는 모습을 왕이 직접 참관하는 의례로, 군사들의 무위(武威)를 배양하고 통수권을 확인하기 위해 시행하였다. 매년 9월과 10월 중 강일(剛日)을 택하여 도성 밖에서 행하였다. 강일은 갑(甲)·병(丙)·무(戊)·경(庚)·임(壬)의 간지가 있는 날을 말한다.

연원 및 변천

대열의의 의주(儀註)를 마련하려는 논의는 세종대에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421년(세종 3) 6월에 의주가 최초로 확정되었고(『세종실록』 3년 6월 1일), 1424년(세종 6) 9월에 왕세자 관련 규정만 개정되었다(『세종실록』 6년 9월 24일). 대열의 의주는 그 뒤 다시 한 번 개정되어 『세종실록』「오례(五禮)」에 수록되었다. 이전의 의주와 비교해 보면, 의식의 준비와 진행 시각, 왕의 동선, 왕세자의 위치, 배례(拜禮)의 횟수 등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왕의 복식이 금갑(金甲)에서 상복(常服)으로, 왕세자 이하 종친 및 문무 관원의 복장도 갑주(甲冑)에서 상복으로 바뀌었다. 왕의 의장도 소가노부(小駕鹵簿)에서 대가노부(大駕鹵簿)로 격상되었다. 정조대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그 당시에 왕은 다시 갑주를 갖추어 입고 대열의에 참여하였다.

절차 및 내용

『세종실록』「오례」를 기준으로 대열의의 절차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행사 11일 전에 병조(兵曹)에서 대열의의 시행을 왕에게 아뢰어 허락을 받고, 장수들로 하여금 군사들을 검열하게 한다. 유사(有司)는 대열의를 시행할 교장(敎場)을 만들고, 왕이 대열의를 관람하는 자리인 선지(墠地)를 교장 북쪽에 설치한다.

행사 전날에는 충호위(忠扈衛)와 액정서(掖庭署)에서 왕의 장전(帳殿)·소차(小次)·어좌(御座), 왕세자의 막차(幕次) 등을 설치하고, 전의(典儀)는 왕세자를 비롯해 종친과 문무 관원의 배위(拜位)를 정한다. 장수와 군사들을 선소(墠所)에 집합시켜 떠드는 것을 금지하고, 방위에 맞는 색깔의 기(旗)를 세운 뒤 화문(和門), 즉 군문(軍門)을 만든다. 군사들에게 지휘 통솔의 절차와 신호를 주지시킨다.

행사 당일이 되면 해 뜨기 전 10각(刻)에 기병과 보병의 모든 군사들이 갑주를 착용하고 직진(直陣)을 만들어 대기한다. 장군과 대장은 기고(旗鼓) 아래에 선다. 1각은 15분을 말한다.

해 뜨기 전 7각에 의례를 알리는 첫 번째 북소리인 초엄(初嚴)이 울리면 궁전문(宮殿門)과 성문(城門)을 개방하고, 대가 노부를 진열하고 호위 군사를 배치하여 왕의 거둥 준비를 마친다. 해 뜨기 전 5각에 두 번째 북소리인 이엄(二嚴)이 울리면, 판통례(判通禮)가 사정전(思政殿)합문(閤門) 밖에서 중엄(中嚴), 즉 왕에게 예식에 참여할 것을 아뢴다. 여러 군사와 관원들도 참여할 준비를 맞추고 대기한다.

해 뜨기 전 2각에 세 번째 북소리인 삼엄(三嚴)이 울리면, 왕이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출궁하여 선소의 악차(幄次)로 들어간다. 종친과 문무 관원은 봉례랑(奉禮郞)이, 왕세자는 부지통례(副知通禮)가 인도하여 배위로 나아간다. 왕이 어좌에 오르면, 통찬(通贊)의 구령에 따라, 왕세자와 종친, 백관들이 왕에게 국궁(鞠躬)·사배(四拜)한다. 중군(中軍)의 장수가 기를 누이면 각 진(陣)의 군사들도 북향하여 사배한다. 절을 마친 종친과 문무 관원은 대차(大次)의 좌우로 이동해, 왕이 관람할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한다.

대각(大角)이 세 번 울리면, 훈련과 습진(習陣) 즉 진법 연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동군과 서군의 대장이 훈련 중 엄수해야 할 군법을 서약하고, 이를 각 군의 여러 지휘관과 군사들에게도 알린다.

북을 울리고 기를 들면 기병과 보병이 행군을 시작한다. 기의 올리고 내림, 징과 북의 두드림에 따라 정해진 진퇴와 동작을 수행하면서 약속된 장소까지 이동해 정렬한다.

정렬한 동서 양군은 오행상승지법(五行相勝之法)에 따라 진(陣)을 만들어 서로 대항하는데, 진법을 다섯 번 바꾸어 가면서 공격과 수비의 전투 능력을 점검한다. 진을 바꿀 때는 군사 50명을 선발하여 상대를 공격하게 한다. 다섯 번의 진법 전환을 마치면 양군은 다시 직진으로 전환한다.

다시 북을 울리고 기를 내리고 올려 양군의 군사들을 약속된 장소까지 이동시킨 다음 접전시킨다. 접전을 마친 군사들은 원래 위치로 돌아온다.

판통례가 대열의가 끝났음을 아뢰면, 왕은 장전(帳殿)으로 돌아가 다안(茶案), 즉 찻상을 받는다. 왕이 차를 다 마시면 판통례가 환궁할 것을 아뢰고, 어가(御駕)가 환궁을 시작한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소순규, 「조선시대 대열의의 의례 구조와 정치적 의미」, 『史叢』75,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