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정(兪大禎)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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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유대정 |
한글표제 | 유대정 |
한자표제 | 兪大禎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광해군 |
집필자 | 정주영 |
자 | 경휴(景休)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52년(명종 7) 10월 18일 |
사망 | 1616년(광해군 8) 8월 초3일 |
본관 | 기계(杞溪)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 522-11 |
증조부 | 유여림(兪汝霖) |
조부 | 유관(兪綰) |
부 | 유호(兪灝) |
모_외조 | 청주 한씨(淸州韓氏) : 한수온(韓守溫)의 딸 |
형제 | (형)유대희(兪大禧), 유대기(兪大祺), 유대록(兪大祿) |
처_장인 | 광주 정씨(光州鄭氏) : 정의신(鄭誼臣)의 딸 →(자녀)3남 1녀 |
자녀 | (1자)유수증(兪守曾) (2자)유시증(兪是曾) (3자)유여증(兪與曾) (1녀)채이건(蔡以乾)의 처 (서1자)유민증(兪敏曾)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유대정(兪大禎) |
총론
[1552년(명종 7)~1616년(광해군 8) = 65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 등을 지냈다. 자는 경휴(景休)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지낸 유호(兪灝)이며,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진위현령(振威縣令)을 지낸 한수온(韓守溫)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기계부원군(杞溪府院君)유관(兪綰)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호조 판서(判書)를 지낸 유여림(兪汝霖)이다. 우의정유홍(兪泓)의 조카이기도 하다.
선조 시대 활동
1582년(선조 15)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고, 1588년(선조 21)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7세였다.[『방목(榜目)』] 급제 후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고 사국(史局)으로 옮겼다가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예문관 대교(待敎)가 되었으나, 정여립(鄭汝立)의 생질로서 예문관 검열이던 이진길(李震吉)의 사초(史草)를 마음대로 소각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국문을 당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22년 11월 25일, 선조 31년 2월 25일,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1591년(선조 24) 이천현감(伊川縣監)에 임명되었는데, 이듬해인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하였다. 그해 7월 이천(伊川)에 분조(分朝)가 설치되었고, 당시 왕세자였던 광해군이 이곳에 머물렀다.[『선조실록』선조 25년 7월 9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25년 7월 1일] 1593년(선조 26) 형조 낭관(郎官)을 거쳐 옹진수령(甕津首領)이 되었다.[『국조인물고』] 1594년(선조 27)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으며, 1595년(선조 28)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을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선조실록』선조 27년 12월 22일, 선조 28년 2월 10일, 선조 28년 6월 16일, 선조 28년 7월 14일] 그해 9월에는 사헌부 집의 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에 제수되었다.[『선조실록』선조 28년 9월 22일] 이때 사헌부 집의로 있으면서 선조의 은혜를 믿고 죄를 지은 내속(內屬)을 논핵하였는데, 이것이 선조의 뜻을 거슬러 더 이상 간직(諫職)에 있지 못하고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으로서 세자시강원의 필선이나 보덕(普德)을 겸하였다.[『선조실록』선조 29년 11월 21일, 『국조인물고』]
1596년(선조 29) 체찰부(體察府)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가 12월 제용감(濟用監)정(正)에 제수되었다.[『선조실록』선조 29년 12월 9일] 1599년 10월(선조 32) 양주목사(楊洲牧使)가 되었으며, 이어 봉산목사(鳳山牧使)를 거쳐 1605년(선조 38) 1월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선조 32년 10월 29일, 선조 38년 1월 4일] 1607년(선조 40) 나주를 다스린 지 3년이 지나 잘 다스린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국조인물고』]
광해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 1)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인 1611년(광해군 3)에 돌아와서 수안수령(遂安守令)에 보임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1년 8월 13일, 광해군 2년 8월 24일, 『국조인물고』] 1612년(광해군 4) 임진왜란 당시 이천 분조가 설치되었던 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올랐고 중추부 동지사에 제수되어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하였다.[『국조인물고』] 1613년(광해군 5) 외직으로 나가서 영흥부사(永興府使)를 지냈으며, 1614년(광해군 6)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5월 28일, 광해군 6년 8월 18일]
그러나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大北派)가 득세하자 곧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국조인물고』] 이후 그는 1615년(광해군 7) 서추(西樞) 겸 비국당상(備局堂上)에, 그리고 이듬해인 1616년(광해군 8)에는 병조 참판(參判)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광해군일기』광해군 8년 1월 14일, 『국조인물고』] 1616년(광해군 8) 8월 초3일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5세였다.
성품과 일화
유대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사헌부 집의 겸 세자시강원 필선에 임명되었을 때, “선비로 있을 때부터 기절(氣節)로 자허(自許)하고 화복(禍福)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논의할 때에는 대범과 정직을 으뜸으로 삼고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 바가 없었으나 단아하고 안정(安靜)한 기미가 부족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28년 9월 22일]
묘소와 후손
유대정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에 있다. 부인 광주 정씨(光州鄭氏)와 합장묘이며, 부좌(祔左)되어 있다.
부인 광주 정씨는 정랑(正郞)정의신(鄭誼臣)의 딸이며 부제학(副提學)정인인(鄭獜仁)의 증손녀인데, 자녀는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유수증(兪守曾)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후에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차남 유시증(兪是曾)은 종친부(宗親府)전첨(典籤)을 역임하였으며 후에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삼남 유여증(兪與曾)은 진사이다. 이 외에 측실에서 아들 유민증(兪敏曾)을 두었다.[『국조인물고』]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묵재일기(黙齋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