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金孝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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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83년(우왕 9)~1440년(세종 22) = 58세]. 조선 초 태종(太宗)~세종(世宗)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부제학(副提學)과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자는 경부(敬夫)이고, 호는 주촌(注村)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을 지낸 김자연(金自淵)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고려 충숙왕(忠肅王)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이문정(李文挺)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말 평해지군(平海知郡)을 지낸 김제해(金齊海)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예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김원로(金元老)이다.

태종~세종 시대 활동

1402년(태종 2)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에서 15위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방목(榜目)』] 1410년(태종 10)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1417년(태종 17)년 예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사신 접대 등의 예부(禮部) 업무를 수행했다.(『태종실록』 17년 8월 3일) 이듬해 형조 좌랑이 되었다.(『태종실록』 18년 1월 16일)

세종이 즉위한지 2년 후인 1420년(세종 2)에 김효정은 사헌부(司憲府) 우헌납(右獻納)에 임명되면서 대간 활동을 시작했다.(『세종실록』 2년 3월 16일) 이때 예조에서 실시할 수 있는 개선안을 보고하라는 세종의 지시에 따라 문초 때 형장을 신중히 사용하고 과부의 삭발을 강제하지 말자는 내용의 개선안을 건의했다.(『세종실록』 5년 5월 28일) 1427년(세종 9)에 이르러 사간원(司諫院)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에 제수되었는데,(『세종실록』 9년 8월 6일) 이때 음란하게 행동한 이지(李枝)의 후처 김씨(金氏)를 엄벌에 처할 것과 서자를 2품 벼슬에 제수한 병조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는 등의 간언을 하였다. 또한 세종에게 민생 안정을 위하여 군용경차관(軍容敬差官)의 파견을 중지해 달라고 건의하여 이를 관철시키기도 하였다.(『세종실록』 9년 10월 17일)

같은 해 말 사간원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로 옮겨간 후 김효정은 더욱 적극적인 간관(諫官) 활동을 벌였다. 특히 세종의 완고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의 친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을 계속해서 탄핵하였는데, 삼군부(三軍府) 소속 관노비 윤이(閏伊)와 사통한 양녕대군을 지방으로 보내고, 그의 아들인 이개(李豈)를 한성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고 상소한 것이다.(『세종실록』 10년 1월 15일) 당시 양녕대군과 윤이의 사통 사건은 강상(綱常)의 윤리에 어긋나는 사건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김효정을 포함한 조정 대신들과 대간들 대부분이 계속해서 탄핵을 벌였다. 그중에서도 김효정은 매번 선두에서 양녕대군을 지방에 보내고 그 작위와 녹봉을 회수하여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등의 강경한 간언을 이어갔다.(『세종실록』 10년 1월 16일) 계속되는 간언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양녕대군을 비호하자 김효정을 비롯한 대간들은 양녕대군 처벌을 조건으로 사직하고 출근 하지 않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세종실록』 10년 1월 19일) 이후에도 김효정은 사헌부 대사헌김맹성(金孟誠)과 함께 하루에만 8번이나 양녕대군을 탄핵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견지했다.(『세종실록』 10년 1월 21일) 거의 3달 동안 김효정을 비롯한 대간들과 여러 조정 대신들이 양녕대군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이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외에도 김효정은 정월 초하루, 동짓날 하례에 중을 참가시키지 말 것과(『세종실록』 10년 1월 15일), 초파일 연등제의 금지를 주장하는 등(『세종실록』 10년 3월 22일) 불사(佛事) 배척 또한 계속해서 간언 했다. 또한 대간의 춘추관 겸직을 반대해 이를 관철시키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0년 3월 22일) 강상의 윤리를 해치는 사건과 관련해서는 특히 엄중한 처벌을 주장했다.

세종은 이러한 김효정의 모든 상소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일부는 육조에 직접 명을 내려 시행하게끔 조치했다. 더불어 1432년(세종 14) 김효정을 집현전 부제학, 호조 우참의(右參議), 이조 좌참의(左參議)에 잇따라 제수하는 등 그를 중용하였다. 이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한 김효정은 1434년(세종 18)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에 제수되었다.(『세종실록』 18년 6월 3일) 그리고 같은 해 8월 성절(聖節) 하례사(賀禮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귀국 후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세종실록』 19년 1월 26일) 이때 김효정은 건강상의 이유로 세종에게 사직을 청했고, 다시 예문관 제학으로 옮겨갔다.(『세종실록』 19년 3월 22일)

성품과 일화

김효정은 1410년(태종 10)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임명된 이래 20년 넘게 대간으로 활동했다. 관리의 임명∙형벌∙인사∙양전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세종에게 간언하는 간관(諫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강상의 윤리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 가장 엄격한 비판과 처벌을 주장했다.

특히 세종대왕의 친형인 양녕대군이 관노비인 윤이와 사통한 것을 강상의 윤리와 국가 기강을 저해하는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양녕대군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탄핵하였다. 이를 계속 거부하던 세종이“성인(聖人)이 말씀하시길‘3번 간언하여도 (임금이) 듣지 않으면 (사직하고) 가버린다’고 했다. 어찌 그리 말이 많은가?”라고 할 정도였다.(『세종실록』 10년 1월 18일) 이에 김효정은 다른 대간들과 함께 사직 후 출근을 거부하는 시위를 벌이며 항의했다. 그러나 이 사안과는 별개로 김효정은 육조와 대간의 요직에 잇따라 기용되는 등 세종의 신뢰를 받았다. 오랜 관직생활에도 불구하고 개인 추문이나, 부패 및 비리에 단 한 번도 연루된 적이 없는 간관이자 청백리였다.

묘소와 후손

김효정의 묘소와 신도비는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에 있다. 숙종 대에 경기도 의성의 구천서원(龜川書院)에 추가 배향되었다.

첫째 부인 진씨(秦氏)는 진치(秦峙)의 딸이며, 둘째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권후(權厚)의 딸이다. 안동 권씨와의 사이에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김경생(金京生)이고, 차남은 김한생(金漢生)이며, 삼남은 김안생(金安生)이다. 삼남 김안생은 1429년(세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대간인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과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냈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동문선(東文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