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전의(立主奠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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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릉의 정자각(丁字閣)에 설치한 길유궁(吉帷宮)에서 우주(虞主)시호(諡號)를 쓰고 전(奠)을 올리는 의례.

개설

산릉의 정자각에 설치한 길유궁에서 미리 만들어 온 우주에 ‘모호대왕(某號大王)’이라고 시호를 쓴 뒤 영좌(靈座)에 모셔 놓고 준비한 음식인 예찬(禮饌)을 갖추어 전을 올리는 절차이다. 국장(國葬)의 절차 중에서 산릉에서 천전의(遷奠儀) 다음에 거행하였다. 우주는 반우의(返虞儀)를 거쳐 혼전(魂殿)에 안치하고, 연제(練祭)를 지낸 후 연주(練主)를 만들면 종묘 뒤뜰 으슥한 곳에 묻었다. 왕비나 왕대비 등의 상인 내상(內喪)의 경우 시호는 ‘모호왕후(某號王后)’가 된다.

연원 및 변천

입주전의 절차는 조선시대에 큰 변화 없이 거행되었다. 단지 영조는 제주관(題主官)을 글씨를 잘 쓰는 당상관(堂上官) 중에서 선발하도록 하였다. 또한 우주에 시호를 쓴 뒤에 의례 중 잠시 쉬기 위해 설치한 소차(小次)에서 기다리다가 친히 입주전을 행하는 것으로 의주(儀注)를 마련하여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수록하도록 하였다.

절차 및 내용

빈전(殯殿)에 모셨던 시신을 안장하기 위해 산릉으로 떠나는 발인의(發引儀)를 거행하기 1일 전에 뽕나무를 깎아 6각인 원통 모양으로 제작하여 위아래로 구멍을 낸다. 이렇게 우주를 만들어 궤(匱)에 담고 흰색 수건을 덮어 빈전의 혼백(魂帛) 뒤에 두었다가 발인하는 날 혼백함(魂帛函) 뒤에 실어 산릉으로 가져 온다. 시신의 안장을 마치면 정자각에 설치한 길유궁에서 가져온 우주를 향을 넣어 달인 물인 향탕(香湯)에 씻은 뒤 붓으로 시호를 쓴다. 우주가 완성되면 예찬을 차려 전을 올린다.

안장이 끝날 때 액정서(掖庭署)에서 왕과 대군, 종친과 문무백관의 자리와 집사관(執事官)의 자리를 설치한다. 봉상시(奉常寺)에서 영좌의 동남쪽에 우주에 글씨를 쓸 때 필요한 기물을 놓을 탁자 3개를 마련하고, 그 위에 붓, 벼루, 먹, 쟁반, 대야, 향내 나는 물, 흰색 모시수건 등을 늘어놓는다. 의례를 행하기 전에 손 씻는 그릇도 설치한다. 집사관이 먼저 설치한 자리에 나아가면 종친과 문무백관, 대군 이하 참여자들이 지팡이를 짚지 않고 자리로 나아간다. 왕이 임시 거처인 악차에서 나와 지팡이를 짚고 자리로 나아간다.

대축(大祝)이 손을 씻고 영좌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우주를 담은 궤를 탁자에 올려놓고, 우주를 꺼내어 향내 나는 물에 씻어 수건으로 닦은 후 탁자에 눕혀 둔다. 왕이 탁자 앞에 북쪽으로 향하여 서면, 제주관이 탁자 앞에 서쪽을 향하여 서서 우주의 앞면에 먹으로 시호를 쓰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물러난다. 대축이 우주를 궤에 넣어 영좌에 안치하고, 그동안 사용하였던 혼백은 함에 넣어 안치한다. 왕은 잠시 악차로 나아가고, 대군 이하는 임시로 설치한 막차(幕次)로 나아간다.

담당관인 유사(攸司)가 제사에 올리는 음식인 예찬을 영좌 앞에, 향로(香爐), 향합(香盒), 초[燭]를 그 앞에 설치하고, 축문(祝文)을 영좌의 왼쪽에 놓는다. 대축이 우주를 꺼내 영좌에 안치한 뒤 흰색 모시수건으로 덮고 그 뒤에 궤(几)를 놓는다. 왕과 대군 이하는 모두 자리에 나아가 꿇어앉는다. 대전관(代奠官)이 세 번 향을 올리고, 잔을 3번 연달아 올린 후에 엎드렸다가 일어나 물러난다. 대축이 영좌의 왼쪽에 꿇어앉아 축문을 읽고 나면, 왕이 엎드려 곡을 할 때, 대군 이하는 모두 곡을 따라 한다. 왕이 곡을 그치면 대군 이하도 모두 곡을 그치고 일어나 네 번 절하고 일어나 몸을 바로 한다. 대축이 우주를 받들어 궤에 넣으면 왕은 악차로 돌아가고 대군 이하는 막차로 돌아간다. 종친과 문무백관도 물러가면, 유사가 예찬을 거두고 축문을 정자각 북쪽의 구덩이에 묻는다(『세종실록』 오례 흉례 의식 입주전의).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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