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량률(壓良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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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량률은 ‘압량위천율(壓良爲賤律)’의 약자로, ‘압량위천’은 ‘양인을 강제로 억압하여 천인으로 삼는다’는 뜻이며, 압량위천율은 이를 처벌하는 법률.

개설

조선시대에는 양인이 피역(避役)의 일종으로 부세가(富勢家)에 투탁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단순한 도망보다는 생계를 안정적으로 보장을 받을 수 있었고, 부세가의 입장에서도 이를 노비로 삼아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군역과 부세(賦稅) 등 국역을 부담하는 양인이 줄어들어 국가의 기반이 약하게 되었다.

압량위천의 방법은 다음이 있다. 첫째, 수탁가(受託家)에서 자기의 도망노비 또는 그 후소생(後所生)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대전후속록』「형전」결옥일한(決獄日限)조에서는 이러한 소송에 대해 당사자가 현재 사망한 경우에 60년 전의 사건은 수리를 금지하였다. 둘째, 양인을 누락노비로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폐사(廢寺)의 노비가 내수사(內需司)에 이속될 때 누락되었거나, 국왕 등으로부터 하사를 받고 그 후 상속 등에서 누락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셋째, 노의 양처소생(良妻所生)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넷째, 문서를 위조하는 것이다. 양인의 투탁 의사에 근거하여 관서문기(官署文記)가 아닌 백문(白文)으로 상속이나 매매문기를 작성하고 이에 대해 관의 증명인 입안(立案)을 받으면 소유권이 확고해진다.

양인들은 토호(土豪), 즉 지주이며 양반 신분인 지방의 유력자, 권력이 있는 관원(官員), 그리고 내수사 및 종친·부마 등에게 투탁하였다. 결과적으로 양인의 사노비화가 촉진되었고, 또 주로 유력가에 투탁함으로써 노비 소유의 집중화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양인의 수가 감소하면서 국역을 부담하는 인원이 줄어들었다.

압량률은 양인의 사노비화를 방지하여 국역을 부담하는 양인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이다. 압량위천(壓良爲賤)에 대해서는 『대명률』에 따라 처벌하였으며, 후대로 갈수록 『경국대전』 등 국전에 범죄 행위 태양(態樣)이 구체화되면서 형벌이 가중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왕조는 초기부터 압량위천에 대해 『대명률』보다 가중 처벌하였다. 이에 대한 첫 조처는 1405년(태종 5)의 "직첩을 회수하고 장 80을 집행한 후 수군으로 삼는다."는 수교이다. 이 수교의 형벌을 "강제로 군인으로 삼는 것은 장 100·도 3년과 같다."는 『경국대전』「형전」 범죄준계(犯罪准計)조의 규정과 함께 검토하면, 『대명률』에서 상정하고 있는 법정형과 같지만 장 80이 추가되어 있고 또 일반 군인이 아닌 더 힘든 수군에 강제로 편입시키는 점에서 『대명률』보다 더 무거운 형벌이다.

세조조에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면서 더욱 가중하여 장 100을 집행한 후 전 가족을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전가사변(全家徙邊)으로 처벌하였고, 뿐만 아니라 이를 신고한 자에게는 범인 소유의 노비 3구를 상으로 주었다.

이후에는 국전과 『대명률』이 혼용되어 적용되었고, 『경국대전』에서는 압량위천을 범죄로 규정하였을 뿐 독자적인 형벌은 규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대명률』에 따른 처벌을 상정한 것이다.

내용

압량위천에는 양인을 강압으로 노비로 삼는 것과 양인의 자발적인 투탁(投託)에 의한 것, 두 종류가 있다. 전자는 억울하게 노비가 된 경우에 양인이 될 수 있는 소량(訴良)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널리 행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후자, 즉 양인의 자발적인 투탁은 당사자의 합의에 의한 것이므로 적발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압량위천의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노비가 되는, 즉 투탁에 의한 것이었다. 이와 유사한 모점양민(冒占良民)은 압량위천과 유사한 것으로, 고공(雇工)으로 삼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압량위천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양인의 국역 부담이 천인인 노비의 그것보다 더 무거웠기 때문에 양인들은 압량위천을 피역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사노비의 신공은 2필인데, 군역을 직접 부담하지 않은 보인(保人)의 봉족가(奉足價)는 5필 내지 15필이었다. 또 이 과정에서 양천교혼(良賤交婚)이 늘어났다. 즉 양인끼리 혼인을 하면 자녀도 양인이 되어 과도한 국역을 부담해야 하지만, 양천교혼의 경우에는 후손은 양역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가벼운 노비의 신공을 부담하면 되었다. 생계를 위하여 신분적 하락은 감수하였다.

압량위천 행위를 한 자에 대해 『경국대전』 등 국전에서는 압량위천에 대한 구체적인 형벌을 적시하지 않고 있으며, 이의 처벌은 원칙적으로 대명률에 따랐다. 『대명률』에는 「호율」 호역(戶役) 수류미실자녀(收留迷失子女)조와 「형률」 적도(賊盜) 약인약매인(略人略賣人)조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수류미실자녀조에서는 미아(迷兒)를 자기의 노비로 삼으면 장 100·도 3년에 처벌하였고, 양인을 강제로 노비로 삼으면 장 100·도 3년에 처벌하였다. 약인약매인조에서는 무릇 모략으로 양인을 약취하여 자기의 노비로 삼거나 노비로 팔면 장 100·유 3,000리로 처벌하였으며, 서로 합의하여 양인을 꾀거나 팔아서 노비로 삼은 경우에는 장 100·도 3년으로 처벌하였다. 즉 모략 등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 유기아나 양인 등을 강제로 자기나 타인의 노비로 삼으면 장 100·도 3년으로 처벌하였다. 장 100·도 3년은 5형 체제에서 교형(絞刑)과 참형(斬刑) 2종의 사형과 3종의 유형(流刑) 바로 아래의 형벌이다.

후대로 갈수록 범죄 유형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이에 따른 형벌도 세분화하였으며 또 가중 처벌하여 양인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변천

『경국대전』에는 ‘압량위천’이란 용어는 보이지 않고, 다만 이에 해당하는 범죄행위 유형만 보인다. 용어 자체는 『대전후속록』에 처음 나타나고, 『속대전』에서 법률 용어로 되면서 16세기 중엽에 확정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이전」 원악향리(元惡鄕吏)조에서 원악향리의 한 유형으로 "양인을 몰래 차지하여 강제로 부리는 자"로 규정하여 타인이 신고하는 것을 허용하고 이조나 경재소(京在所) 등에서 사헌부에 고소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으며, 도형에 해당하는 자는 본도의 피폐한 역의 역리로 삼았다.

국경 지역의 실변(實邊) 정책이 강화되면서 압량위천에 대해서는 장 100·유 3,000리나 전가사변으로 엄하게 처벌하였고, 이는 중종 연간에 개별적으로 등장하다가 1543년(중종 38)에 편찬된 『대전후속록』「형전」 잡령조에 다양하게 규정되었다. 첫째, 강제로 양인을 천인으로 삼은 자는 (중략) 수속(收贖)을 허용하는 대상에서 제외하고 모두 본역으로 양계(陽界: 평안도, 함경도) 및 황해도에 전가사변으로 처벌한다. 둘째, 어린아이를 꾀어 숨겨 두었다가 장성하기를 기다려 노비로 삼는 자는 장 100·유 3,000리로 처벌하며 관령·절린·색장 등이 알고서도 검거하지 않으면 죄인의 죄에서 1등을 감경하여 처벌하고, 이를 보고하지 않은 관리는 무겁게 죄를 논한다. 셋째, 평안도와 함경도의 양인을 거짓으로 노비로 삼아 데리고 온 자와 (이를) 매매하는 사람이 몰래 데리고 올라온 경우에는 모두 전가사변에 처하고, 자수한 자는 죄를 면제한다.[1516년(중종 11) 7월 27일 형조(刑曹) 수교(受敎)] 그리고 금제(禁制)조에서는 "함경도 관청에 소속된 사람 및 토호인 품관 등이 동거하는 비부와 고공 이외에 양민을 모점하여 숨겨두고 사역을 시킨 경우 제서유위율로 논단하고, 3인 이상을 사역시킨 경우에는 전가사변에 처하며, 사정을 알고 있는 담당 아전·권농·이정·세 가까운 이웃[三切隣]은 또한 위의 율로 논단한다. 내수사의 별차는 파출한다. 모두 사면령 전후를 분간하지 않는다(다른 도도 같다)."고 하였다. 잡령조의 둘째와 셋째는 각각 『속대전』 「형전」 사천조와 잡령조에 수록되었다.

즉 강제로 양인을 천인으로 삼는 일반적인 행위 및 어린아이를 유괴하여 나중에 노비로 삼는 행위를 『대명률』보다 엄격하게 처벌하였으며, 범인 본인만이 아니라 관련자도 처벌하였다. 그리고 실변 정책을 강조하여 평안도와 함경도에서의 행위를 더욱 엄격하게 처벌하였으며, 범죄인 본인만이 아닌 가족을 연좌하여 전가사변에 처하여 처벌과 함께 강제 사민으로 실변 정책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속대전』에는 ‘압량위천’의 범주를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확대하고, 절차법적으로 정비하였다. 유지한 조문은 다음이다. 첫째는 「호전」 징채(徵債)조에 나오는 것으로, 사채(私債)를 갚지 못하자 그 대신에 자녀를 강제로 노비로 삼는 행위를 장 100으로 처벌하고 자녀를 돌려주었다. 둘째는 「형전」 속량조에 나오는 것으로, 이미 본인이나 조상이 속량(贖良)시킨 노비에 대해 핑계를 대고 다시 노비로 삼으려는 경우를 이에 따라 처벌하였다.

또 「형전」 속량조를 보면, 압량위천의 개념을 확대한 것으로는 첫째,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노비의 소유가 귀속되었는데도 노비의 소유를 주장하는 경우, 둘째, 자기의 노비가 아닌데도 거짓으로 팔거나 속량한 다음 원래 주인이 추심하자 훔쳐 판 자가 그 속량전을 노비에게 받는 경우 등이다.

절차법적인 측면에서의 정비는 다음과 같다. 『속대전』에서는 3년이 지나면 제소를 금지하였는데, 청리(聽理)조에 의하면, 압량위천의 경우 3년 이내에 제소하지 못한 사유를 분별하여 처벌하였으며, 이미 양인이 된 것이 비록 허위일지라도 그 사건이 60년 전에 발생하였거나 또는 2대 이상 양역(良役)을 부담하였을 경우에는 제소를 금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침학하면 압량위천율(壓良爲賤律)로 처벌하였다.

조선후기에는 투탁의 일종으로 본인이나 가족을 스스로 매매하여 노비가 되는 예가 자주 있었다. 이것은 형식상 자발적인 매매이지만 양인의 수가 감소되고 천인이 늘어나는 점에서는 압량위천과 차이가 없었다. 이에 대해 『속대전』에서는 "자신의 몸을 자발적으로 파는 자는 처를 파는 율로 처벌한다(사는 자도 같다)."고 규정하여 금지하였다. 여기서 ‘처를 파는 율’은 『대명률』의 약인약매인(略人略賣人)의 "자기의 처를 팔아 여종이 되게 한 자는 (중략) 각각 ‘일반인이 양인을 꾀거나 합의하여 판 법’에 따른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후기에는 여전히 자매가 성행하여 자발적으로 노비가 되는 예가 많았다.

의의

압량위천율은 부세와 군역 등 국역을 부담하고 국가의 토대가 되는 양인을 확대 내지 유지하려는 정책이었다. 법적으로 금지하고 위반 행위를 처벌하였는데, 초기에는 『대명률』에 따랐으나, 사민실변(徙民實邊) 정책의 추진에 따라 연좌형인 전가사변 등으로 더욱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속대전』에서는 더욱 자세히 규정하고 또 이의 한 형태인 자매까지 규제하였다. 그러나 양인이 과중한 국역의 부담에서 회피하려는 의도와 세력자가 노비를 늘리려는 입장이 합치하여 엄중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는 않았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 『대명률(大明律)』
  • 『속대전(續大典)』
  • 柳承源, 『朝鮮初期身分制分硏究』, 을유문화사, 1987.
  • 池承鍾, 『朝鮮前期奴婢身分硏究』, 일조각, 1995.
  • 박경, 「自賣文記를 통해 본 조선후기 하층민 가족의 가족질서」, 『古文書硏究』33, 한국고문서학회, 2008.
  • 李成茂, 「朝鮮時代 奴婢의 身分的 地位」, 『韓國史論』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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