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가사변(全家徙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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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전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

개설

전가사변(全家徙邊)은 『대명률(大明律)』에 근거한 오형(五刑)에 속하지 않는, 조선시대 독자적인 형벌이다. 죄인을 가족과 함께 평안도나 함경도의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로 사면령에서도 제외되었고 종신토록 석방되어 돌아올 수 없었다. 사민(徙民)의 목적을 위하여 형벌을 강화시킨 성격이 강하였다. 중국에서는 진나라대 이후로 사민 정책이 실시되었으나 용어나 개념상으로는 ‘전가사변’이 등장하지 않았고, 한나라대에 형벌로서 사변형(徙邊刑)이 행해졌으나 통치권에 위험한 인물들을 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시대의 전가사변과는 기능과 목적이 달랐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전가사변은 조선초기 사민(徙民) 정책을 배경으로 출발하였다. 세종 때부터 북변 개척이 시작되어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키는데 이에 응하는 자가 없자 그에 대한 정책의 하나로 형벌로서의 전가사변을 실시하였다. 일반인의 강제 이주에 따른 백성들의 원성을 덜어보자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종대에는 하삼도의 군사(軍士) 및 양민, 향호(鄕戶) 중에서 장정 셋 이상의 부실(富實)한 호를 초정(抄定)하여 북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늑령사변(勒令徙邊)을 보충하는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전가사변이라는 용어도 아직 등장하지 않고 ‘전가입거(全家入居)’가 주로 사용되다가 문종대부터 ‘사변’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명종대 이후로는 특정한 범법 행위를 ‘전가사변지죄(全家徙邊之罪)’나 ‘전가사변지류(全家徙邊之類)’로 규정하며 전가사변이 독립적인 형률로 발전하였다.

내용

『경국대전』에서는 「형전(刑典)」 죄범준계조(罪犯準計條)에서 전가사변을 변원충군(邊遠充軍), 위노(爲奴), 속잔역리(屬殘驛吏)와 함께 장 100 · 유 3,000리에 준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전가사변이 적용된 구체적인 죄목을 살펴보면, 『경국대전』에는 도망한 사민을 허접(許接)한 자, 살아 있는 공천을 죽었다고 한 일족 및 색리(色吏), 사형에까지는 이르지 않는 강도와주(强盜窩主) 등이 수록되었다. 『대전속록』에는 도망한 공사천을 1년 이상 허접한 호수(戶首), 공사천을 은닉하거나 사역한 자, 공천 3구 이상을 사역한 현관 이하 관원 및 알고도 알리지 않은 근린(近隣), 타인을 대신 보내거나 원패[圓牌]를 분실한 조졸(漕卒)의 호수, 전세선(田稅船)에 사물(私物)을 함께 실은 천호 및 물주, 경기도·강원도의 전세 직납(直納) 때 농간부린 공리(貢吏), 공리와 내통하여 전부(佃夫)에게 대납을 강요한 경중의 부호, 고독(蠱毒)을 끼치고 도망한 자를 허접한 사람 및 근린, 절도를 재범한 자 등 9항목이 추가되었다. 『대전후속록』에는 도망해온 양계변민을 보고하지 않은 통수(統首)·이정(理正) 및 권농, 도망해온 양계변민을 허접한 자, 양계 양인을 노비라고 데려온 자 및 흥판인(興販人) 등을 몰래 끌어온 자, 도망한 제주 3읍의 백성을 허접한 자, 양인을 억압하여 천민으로 삼은 자, 3인 이상 양민을 모점하거나 사역한 함경도 관속인·토호품관 및 알고도 알리지 않은 색리·권농·이정·삼근린, 군사의 대리 관방(關防)을 3회 이상 적발하지 않은 색리, 영송(迎送) 군인의 성명을 일컫고 대신 가거나 몰래 들어온 천인, 외공(外貢)을 상납할 때 공리를 침범하여 농간부린 사주인(私主人)·경주인(京主人), 사섬시에 상납하는 노비신공을 환납(換納)한 사주인·외리(外吏), 공물을 대납한 자, 공물을 받아 남용한 외리, 수년간 전세를 미납한 자, 공채를 많이 빌려 쓰고 갚지 않은 자, 3인 이상이 1관 이상 또는 2인이 2관 이상을 절도한 초범 및 절도 재범자, 외방에서 운송해 온 물건을 중도에서 가로막아 억지로 매매한 자, 복초(服招)한 후 도망하거나 죽은 강도의 처자, 향리에서 권세로써 백성을 못살게 구는 호강 품관, 수령이 교체되는 틈을 타서 관물(官物)을 횡령한 자, 두세 곳에 이치에 닿지 않는 소송을 제기한 자, 감사나 수령을 고소한 품관 및 이민(吏民), 문서를 위조한 자, 위조한 문서를 가지고 쟁송한 자, 공사천을 은닉하거나 사역한 죄를 면하려고 문서를 위조하여 자기 노비라고 쟁송한 자, 결송아문에 서성이며 사람을 꾀어 쟁송하도록 일삼는 자, 우마도살을 수창(首唱)한 자, 우마를 도살한 자, 20관 이상 화물을 부탁하여 당물(唐物)을 무역한 자 및 수탁자, 여자 의복으로 변장하여 인가를 출입한 자, 부경인(赴京人)이 의주에 먼저 보낸 금은을 맡아 보관한 자, 은철을 가지고 가다 매매 장소가 아닌 곳에서 붙잡힌 부경인, 부경인에게 은철을 팔거나 맡긴 자 및 운반해 준 자, 유죄(流罪)를 범한 상한·공사천, 원악향리, 정리가 몹시 중한 강상죄인 등 죄목이 대폭 증가하였다. 이후에도 전가사변 죄목은 계속 추가되어 『수교집록』, 『신보수교집록』 등에 수록되었는데, 현재까지 파악되는 죄목이 130여 항목에 이르고 있다.

변천

세종대 사민 정책에서 시작되어 300여 년간 지속되다가 영조대에 흠휼(欽恤) 원칙에 근거하여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 변천 과정은 네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기는 세종대부터 성종대까지로, 입거(入居)라는 개념으로 처음 등장하여 사민 정책을 보충하는 방편으로 시행된 시기이다. 2기는 연산군대부터 중종대로, 사민 정책의 전담 기구인 입거청(入居廳)이 등장하고 범죄인에 대한 전가사변이 사변 정책의 중심에서 논의되는 시기이다. 3기는 명종대 이후로, 일반화된 전가사변의 개념이 등장하고 이에 해당하는 죄목들이 정비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사민 정책에 대한 논의 자체가 나타나지 않고 전가사변이 독립적인 형률로서 기능하였다. 4기는 전가사변의 폐지기이다. 숙종대에는 전가사변율로 적용한 죄목들 가운데 일부는 과중하다고 인식되어 세 차례에 걸쳐 감정(減定)하는 조치들이 취해지다가 1744년(영조 20)에 이를 완전히 폐지하고 유형(流刑)으로 대체하였다. 이후 영조대 편찬된 『속대전』 「형전」 추단조에 "전가사변율을 모두 없앤다."고 수록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의의

전가사변은 죄인을 가족과 함께 변방에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로 법리적으로는 전통사회 연좌율의 성격을 지니며 역사적으로는 조선초 북방 개척 과정에서 실시하였던 사민 정책의 목적을 위하여 형벌을 강화시킨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석희, 「世祖朝의 徙民에 관한 고찰」, 『부대사학』2, 1971.
  • 김지수, 「朝鮮朝 全家徙邊律의 역사와 법적 성격」, 『법사학연구』32, 2005.
  • 이수건, 「조선 성종조의 北方徙民政策(上)」, 『아세아학보』7,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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