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인(私主人)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세종대부터 선조대까지 약 2세기 동안에 있었던 중간상인으로 경주인에 대칭되는 용어.

개설

조선 건국 이래 서울 도성에는 외방 군현의 공물을 상납하고 서울에 번을 서기 위하여 올라오는 군인들을 관리하는 기구로서 경저(京邸)와 그 책임자인 경주인(京主人)이 설치되어 있었다. 경주인은 서울의 시장을 매개로 그들의 역할을 완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물을 비롯한 각종 세공의 대납(代納)방납(防納), 그리고 지방에서 필요한 공물을 서울에서 구입하여 납부하는 현상이 점차 일반화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던 경주인을 대신하여, 도성 상인이나 중앙 각사(各司)의 하인이 주축이 된 사주인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지방에서 공물을 상납하러 온 향리에게 숙박을 제공하거나 서울의 시장에서 공물을 무역하는 것을 중개·알선하는 역할을 하였다. 나아가 지방의 공물을 대납하거나 방납하면서 막대한 상업 이익을 거두었다.

이 같은 사주인은 본래 합법적인 존재가 아니었고, 공물제도의 모순과 정치 기강의 문란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이 되면 사주인층은 확고하게 성장하였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즉, 중앙 각사에서 수납하는 모든 세공물(稅貢物)에 각각의 주인권이 설정되는 단계에 도달하였고, 이들 사주인은 공물주인(貢物主人)으로 불렸다. 그리고 후대 대동법의 실시에 따라 공물주인은 공인층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변천

사주인의 기원은 공납제의 변천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따라서 공물 대납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던 세종대에 이미 사주인이 발생하고 있었으며, 대납이 무제한 허용되었던 세조대에 이르러서는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사주인의 명칭이 정식으로 사용된 것은 1471년(성종 2)부터이며(『성종실록』 2년 5월 25일), 『경국대전』에서도 처음으로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후 공납제가 대동법으로 개정될 때까지 사주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 명칭도 사주인·각사사주인(各司私主人)·각사주인·강주인(江主人)·방근거민(傍近居民)·경강거인(京江居人)·초주인(草主人) 등이 많이 쓰였다. 이 밖에 흥리인(興利人)·방납지인(防納之人)·방납모리지도(防納牟利之徒)·모리지도(牟利之徒)·시정인(市井人)·시정모리지도(市井牟利之徒) 등도 같은 뜻으로 쓰이다가 1573년(선조 6) 이후부터는 점점 공물주인, 즉 공인(貢人)으로 통칭되었다.

이들 사주인층의 활동은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하나의 영업권으로 형성되면서 사주인권의 형태로 정착되어 갔다. 이러한 권리는 일반적으로 자손들에게 분할·세습되었다. 당시 사주인은 도성 상인 또는 상인 출신으로서, 중앙 각사의 하인으로 진출해 있던 이른바 각사주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방납의 자본을 얻기 위하여 부상대고(富商大賈)와 연결되기도 하고, 또 원활한 방납 활동을 하기 위하여 권세층과 결탁하기도 하였다.

16세기 후반이 되면 중앙 각사에서 수납하는 모든 세공물(稅貢物)에 각각의 주인권이 설정되는 단계에 이르렀고, 이들 사주인은 공물주인이라고 불리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모든 궁가(宮家)나 사대부 등 권세층이 방납에 깊이 관여하여 사주인과의 연결이 더욱 많아졌다. 심지어는 노비 신공(身貢)마저 방납하기에 이르렀다.

사주인층의 성장이 확고해지면서 결국 그 존재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공물 자체의 사정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공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것은 거의 사라졌다. 이런 환경에서는 사주인이 공물을 대신 내주고 그 대가를 받는 방납의 폐단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사주인을 거치지 않고는 각 관에서 공물로 바칠 현물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방납을 금지하는 법령은 오히려 백성이 부담해야 할 방납 가격을 인상시킬 뿐이었다. 백성은 공물가(貢物價)와 역가(役價)로 쌀이나 포(布)를 납부하고, 대부분의 공물은 사주인을 통해 시장에서 구매하여 납부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경각사(京各司)의 입장에서도 자신들에게 필요한 많은 종류의 물품들을 자체적으로 구매·조달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 역할을 담당할 인력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경각사의 운영에는 많은 운영비와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나, 중앙정부에서는 이를 위한 비용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운영비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도 사주인이었다. 사주인들이 공물주인으로서 경각사에 공물을 조달하고, 그들의 노동력과 물력으로 경각사에서 필요한 사환과 경비를 대지 않으면 경각사는 그 기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사주인에 대한 인식은 비판과 금지의 대상에서 현실적으로 긍정할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대동법의 시행과 함께 사주인의 역할을 대체하는 세력으로 공인이 상정되었다.

조선전기 사주인층의 상업 활동은 국가의 세금 수납이나 역의 징발과 같은 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중개·알선 과정에서 그들이 청부 대상으로 삼고 있던 각종 부세와 공물은 그 자체가 사적인 유통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도성의 시장에서 공급되거나 조달되는 상품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부세 수납을 이용한 상업 활동은 바로 이 시기 국가적 물류 체계와 관련된 상업의 발전과 그에 따른 유통 체계의 형성을 잘 보여 주었다. 상행위를 억제하던 조선전기의 억말책(抑末策) 아래에서도 도성 중심의 유통 체계가 정비되어 갔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사회질서 속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상업계의 발전과 진보도 이와 같은 조선전기 상업의 역사적 전제 위에서 펼쳐졌다.

참고문헌

  •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편,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한울, 1990.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 김진봉, 「사주인 연구」, 『대구사학』 7·8, 1973.
  • 박평식, 「조선 전기의 주인층과 유통 체계」, 『역사교육』 82, 200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