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종헌(徐宗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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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56년(효종7)∼1712년(숙종38) = 57세]. 조선 후기 숙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치도(致度)이고,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아버지는 서문하(徐文夏)이고,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는 학생(學生) 정이화(鄭以和)의 딸이다. 부사(府使)서정리(徐貞履)의 손자이고, 영의정 서문중(徐文重)의 조카이며 영의정서종태(徐宗泰)의 4촌이다.

숙종 전반기 활동

1678년(숙종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0년(숙종6) 나이 25세 때 정시(庭試)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숙부 서문중도 47세의 나이로 같은 방(榜)에 장원 급제하였다.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는데, 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을 겸임하여 『현종실록(顯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이후에 병으로 오랫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다가, 1688년(숙종14) 예조 · 병조의 낭관(郎官)을 역임하였다. 1688년(숙종14)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남인이 집권하여,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고 희빈장씨(禧嬪張氏)가 왕후로 될 때 오두인(吳斗寅) · 박태보(朴泰輔) 등이 주도하여 80여 명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데에 그도 참여하였다. 모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오두인 · 박태보는 귀양가는 도중에 죽었으며, 그도 죽을 뻔 하였으나, 집안 삼촌, 사촌들의 구원으로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그 뒤에 오랫동안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고 집안에서 폐인처럼 지냈다.

숙종 후반기 활동

1694년(숙종20)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서 서인이 집권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그도 다시 기용되어 몇 년 동안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사간원에서 정언(正言) · 헌납(獻納) · 사간(司諫)을 지냈고, 사헌부에서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세자시강원에서 필선(弼善) · 문학(文學) · 보덕(輔德)을 지냈고, 성균관에서 사성(司成)을 지냈다. 그 밖에 종부시(宗簿寺)정(正)을 지내면서 항상 지제교(知制敎)를 겸임하였다. 홍천현감(洪川縣監)으로 있을 때, 경비의 지출을 최대한 줄이고 다방면으로 곡식을 매입하여 두었다가, 1695년(숙종21) 을해년 기근(饑饉)에 그 곡식으로 굶주리는 사람을 구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699년(숙종25)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고, 임천군수(林川郡守)가 되었다. 그 뒤에 병조 참지에 임명되고, 승정원 승지(承旨)에 발탁되었다가, 공조 참의로 옮겼다. 1701년(숙종27) 숙종이 후궁(後宮) 장씨(張氏)에게 자진(自盡)을 명하였을 때 서종헌은승지로 있었는데, 장씨는 세자의 생모이므로 동궁을 위하여 목숨만은 살려주기를 간청하다가, 조정에서 쫓겨났다. 그는 자원하여 인천부사(仁川府使)로 나갔다가 연달아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나가 궁중에서 멀리 떨어져 지냈다. 돌아와서 호조 · 예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1709년(숙종35)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 그 뒤에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다가,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로 옮겼는데, 1712년(숙종38) 2월 1일 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57세였다.

평소에 송나라 조선료(趙善璙)의 『자경편(自警編)』을 즐겨 읽고 생활 지침으로 삼았는데, 틈틈이 우리나라 현인들의 사례를 수집하여, 『속자경편(續自警編)』 5권을 저술하였다.

소론과 희빈장씨 옥사

1688년(숙종14) <기사환국>이 일어나서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희빈장씨가 왕후가 되었는데, 숙종은 남인 권대운(權大運) · 김덕원(金德遠) 등과 손을 잡고, 이를 반대하던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 등을 유배보냈다.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송시열은 다시 조사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이때 숙종이 남인과 서인의 대립을 이용하여 희빈장씨를 왕후로 책봉하자 서인의 노론과 소론이 힘을 합쳐서 오두인 · 박태보 등 80여 명이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는데, 소론에 속하였던 서종헌도 이에 참여하였다. 80여 명의 서인들은 모두 체포되어 국문(鞠問)을 받고 유배되거나 파직되었다. 서종헌도 참혹한 형벌을 받고 겨우 목숨을 건져 벼슬에서 쫓겨나서 6년 동안 집안에서 칩거하였다.

1694년(숙종20) <갑술환국>이 일어나서 중전장씨가 희빈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였다. 희빈장씨의 거취 문제를 놓고 소론의 온건론과 노론의 강경론이 대립하였는데, 숙종은 희빈장씨를 그대로 살려 두고자 하였다. 이때 도승지로 있던 그의 삼촌 서문중은 숙종의 뜻을 받들고, 여러 관료들을 돈녕부(敦寧府)에 모아서 희빈장씨의 거취 문제를 의논하면서, 희빈장씨 모자에 대하여 온건론을 주장하다가, 노론의 강경파 송광연(宋光淵) 등의 비난을 받고 도승지를 사임하였다. 숙종의 뜻대로 희빈장씨는 목숨을 부지하고, 세자의 문안을 통하여 모자가 아침 · 저녁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인현왕후 생전에 희빈장씨가 궁녀를 시켜서 신당(神堂)에서 인현왕후를 저주했던 사실이, 인현왕후 사후에 발각되었다. 1701년(숙종27) 숙종은 희빈장씨와 궁녀를 직접 심문하고 희빈장씨에게 자진(自盡)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승정원에 승지로 있던 서종헌은 동부승지(同副承旨)윤지인(尹趾仁)과 함께 대궐에 들어가서 장씨는 세자의 생모이므로 동궁을 위하여 목숨만은 살려주기를 간청하면서 숙종의 친국을 만류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곤장을 맞고 파직되었다. 이때 희빈장씨에게 관대한 태도를 취하던 소론의 남구만(南九萬) · 최석정(崔錫鼎) 등은 몰락하고,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숙종 시대 희빈장씨 옥사를 둘러싸고 남인과 노론 · 소론의 부침이 거듭되었는데, 당쟁의 본질은 군권(君權)과 신권(臣權)의 싸움이었고, 희빈장씨 모자는 그 희생양이 되었던 셈이다.

성품과 일화

서종헌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항상 몸이 약하여 마치 자기 자신이 입은 의복도 추스르지 못할 것처럼 보였으나 내면은 굳세고 올발라서 구차하게 남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선악(善惡)과 일의 득실(得失)을 논할 적에는 비록 절친한 사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람됨이 온화하면서도 법도가 있었고, 분별력이 있어서 뽐내지도 않았으며, 공손하여 사람들과 간격을 두지 않았으므로, 친구를 사귈 때에도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성품이 편안하고 소박하여 관직으로 진출하는 데에 굳이 연연하지 않았다. 대대로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일찍 출세를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좇는 영달(榮達)의 길을 멀리하고, 한가함을 즐기면서 집안에 깊이 들어앉아 병이라 핑계하고 혼자 지냈다. 좌우에 도서(圖書)를 쌓아놓고 마당에는 온갖 화초를 심어두고 종일토록 팔베개하고 조용히 누워서 지냈는데, 간혹 열흘 이상 문밖을 출입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파주(坡州) 만장(晩莊)의 선영에 있는데, 최창대(崔昌大)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곤륜집(昆侖集)』 권18 「관찰사 서공 묘갈명(觀察使徐公墓碣銘)」) 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는 김환(金煥)의 딸인데,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서명연(徐命淵)은 문과 출신으로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곤륜집(昆侖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