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영(鄭自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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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74(성종 5) = ?]. 조선 초기 세종(世宗)~성종(成宗)때의 문신.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 공조 참판(參判),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본관은 영덕(盈德)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봉례(奉禮)정도(鄭道)이고, 할아버지는 정태서(鄭台瑞)이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34년(세종 16)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學諭)에 보임(補任)되었다. 이후 성균관 박사와 성균관 직강(直講), 성균관 사예(司藝)를 역임했는데, 성균관 박사로 있을 때 세종의 명령으로 평산(平山)으로 가서 목욕을 할 경우 안질(眼疾)이 치료되는지 시험하였다.(『세종실록』 23년 1월 19일),(『세조실록』 2년 3월 3일),(『성종실록』 5년 12월 16일)

1464년(세조 10) 성균관 사예로 있을 때, 세조(世祖)가 성리(性理)의 설을 강론하게 하고, 직후 정자영에서 이르기를, “너는 학문에 매우 익숙하니, 반드시 남이 알지 못하는 공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자기를 위해서 많이 공부한 데 지나지 않는다. 자기를 위한 학문이란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것이다. 지금 네가 나에게 칭찬과 포장(褒奬)을 받는 것도 또한 다복(多福)을 구하는 것이다”라며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0년 7월 27일),(『세조실록』 10년 7월 27일) 이어 세조가 직접 병법의 대요를 논한 책인 『병장설(兵將說)』의 주를 교정하는 데 참여했다.(『세조실록』 10년 9월 22일)

1465년(세조 11) 세조가 정자영과 성균관 직강구종직(丘從直), 유희익(兪希益) 등에게 『주역(周易)』의 구결에 대해서 논의하게 했다. 세조는 특히 정자영과 구종직이 논란하는 것을 즐겨 보았는데, 이 둘에 대하여 “내가 두 사람이 참으로 학문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옛 사람이 황금으로 죽은 말을 샀으니, 저 두 사람은 모두 유가(儒家)의 늙은이인데 내가 이렇게 대접하는 것은 천리마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비유하며, 정자영을 중추원 첨지사로 삼았다. 구종직과 정자영은 학문에 있어서 장구(章句)를 외우고 암송할 뿐이었지만, 정자영이 구종직에게 비하여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세조실록』 11년 10월 6일),(『세조실록』 11년 10월 6일)

1466년(세조 12) 세조는 정자영, 어세공(魚世恭) 등을 불러서 경사(經史)를 강론하게 했다. 이후에도 정자영은 『시경』, 『주역』, 「태극(太極)과 무극(無極)의 이치」 등을 가지고 여러 신하들과 논쟁했다.(『세조실록』 12년 1월 17일),(『세조실록』 12년 4월 15일),(『세조실록』 12년 4월 19일),(『세조실록』 12년 6월 2일) 이후 경학을 강론한 공으로 중추부 동지사(同知事)에 임용되었다.(『세조실록』 12년 6월 16일) 이후 정자영은 주로 종친, 재추(宰樞), 문신을 대상으로 성리를 강론하는 자리에 참여했다.(『세조실록』 12년 7월 1일),(『세조실록』 12년 7월 23일),(『세조실록』 12년 11월 2일),(『세조실록』 13년 3월 1일),(『세조실록』 13년 7월 7일)

1467년(세조 13) 정자영은 정인지(鄭麟趾), 김예몽(金禮蒙) 등과 함께 『시경』과 『서경』의 구결을 교정하는데 참여했으며, 이 시기에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다.(『세조실록』 13년 12월 1일),(『세조실록』 13년 12월 2일),(『세조실록』 13년 12월 12일) 1468년(세조 14) 세조는 정자영과 구종직, 안효례(安孝禮), 최호원(崔灝元) 등에게 『어정주역구결(御定周易口訣)』(이하 『어정구결』)을 논란하게 하였다. 이때 정자영은 권근(權近)의 구결을 따르며 그의 설이 정자(程子)와 합하였다고 보았다. 그러나 세조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어정구결』을 따랐으므로, 세조는 정자영이 잘못했다고 평가했다. 이로 인해 구종직이 정자영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세조는 듣지 않았다.(『세조실록』 14년 8월 5일),(『세조실록』 14년 8월 10일) 이후 가자(加資)되어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이르렀다.(『세조실록』 14년 8월 12일)

예종~성종 시대 활동

1468년(예종 1) 정자영은 겸 경연청(經筵廳) 동지사를 거쳐 이듬해인 1469년(예종 2) 겸 성균관 동지사에 올랐다.(『예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예종실록』 1년 5월 21일) 그는 계속해서 종친과 문신에게 경서를 강론하고, 경연에서는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했다.(『예종실록』 1년 8월 21일),(『예종실록』 1년 9월 20일)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1470년(성종 1) 경연에서 『논어』「학이편」을 진강한 이래로 계속해서 경연에 참여하였다.(『성종실록』 1년 1월 7일)],(『성종실록』 2년 2월 15일),(『성종실록』 2년 3월 12일),(『성종실록』 2년 11월 13일),(『성종실록』 3년 5월 28일) 한편 그는 현재의 예문관(藝文館)이 옛날의 집현전일 때에는 관리에 자리가 빌 경우 신중히 한 사람을 가려서 뽑았으나 지금은 뽑은 자가 70명이나 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관리 뽑는 방법을 바꾸자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성종실록』 3년 9월 28일) 이즈음 사헌부 장령허적(許迪)이 정자영은 타인의 잘못은 쉽게 지적하면서도 정작 사헌부에서 관련된 것을 물으면 답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국문하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성종실록』 3년 11월 30일),(『성종실록』 3년 12월 1일)

성품과 일화

정자영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확신이 있어 소견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소박하고 고루하여 변통(變通)이 없었으며, 독서함에 문의(文義)를 관찰하는 데에도 또한 고지식함이 많았다. 그리고 어릴 때에 학문을 하러 나가서 10년 동안이나 귀성(歸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시에 경시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오경(五經)만 잘 알 뿐 아니라, 능히 여러 역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먼저 어떤 학문의 뜻을 얻었을 경우에는 비록 그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 견해를 변치 않고 고수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집요하다고 일컬었다.(『세조실록』 12년 6월 16일),(『성종실록』 5년 12월 16일),[『점필재집(佔畢齋集)』「이준록(彝尊錄)」 권상],[『해동야언(海東野言)』 권6]

후손

그의 아들은 정계동(鄭繼仝)이며, 4대손은 정영국(鄭榮國)이다. 정영국은 1594년(선조 2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99년(선조 32)에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로서 춘추관(春秋館)편수관(編修官)을 겸직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후 비행을 자행하였으므로,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점필재집(佔畢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영덕정씨문과인맥도 https://www.krm.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