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윤(裵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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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2년(세종 4) = ?]. 조선 전기 태종(太宗)~세종(世宗) 때의 문신. 병조 좌랑(佐郞),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 등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거주지는 서울과 성주이다. 아버지는 고려 후기 홍문관(弘文館)직제학(直提學)사간원(司諫院) 직제학 등을 지낸 배규(裵規)이고, 어머니 수원 김씨(水原金氏)는 고려 후기 집의(執義) 및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역임한 김승득(金承得)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후기 공조판서(判書)를 지낸 배진손(裵晉孫)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후기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지낸 배용성(裵用成)이다. 주로 간관(諫官)의 역할을 맡았으나, 탄핵이나 파직을 당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태종~세종 시대 활동

1411년(태종 11)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1414년(태종 14)에는 병조 좌랑을 역임 중이었는데, 김숭(金崇)을 잘못 천거했다 하여 탄핵을 받기도 했다.(『태종실록』 14년 1월 10일) 결국 파직되었는데, 그때의 이유는 “종묘제(宗廟祭)의 대축(大祝)이 되어 희생(犧牲)을 이끌고 주방(廚房)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또 희롱하여 웃고 불경(不敬)하였다”는 것이었다.(『태종실록』 14년 1월 19일) 그러나 태종의 명에 의해 면죄를 받았다.(『태종실록』 14년 2월 13일) 이후 1416년(태종 16)에는 승정원 주서를 제수 받았고,[『당후선생안(堂后先生案)』] 이듬해에는 사헌부(司憲府)헌납(獻納)이 되었다.(『태종실록』 17년 윤5월 26일) 이때에도 무고 등의 이유로 의금부(義禁府)에 갇히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태종실록』 17년 6월 11일) 세종 때에는 사헌부 장령(掌令)을 거쳐 직집현전(直集賢殿)까지 올랐다. 얼마 후 세상을 떠나자 임금이 관(棺)과 쌀 10석, 종이 70권을 부의로 하사했다.(『세종실록』 4년 9월 23일),(『세종실록』 4년 12월 24일)

성품과 일화

부인 수성 나씨(壽城羅氏)는 배윤이 죽었을 때 머리를 깎고 3년 동안 무덤을 지켰으며, 상례와 장례를 불교식이 아닌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지냈다 하여 정려(旌閭) 받았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세종실록』 8년 8월 16일) 아버지 배규가 청요직에 오른 것에 이어 배윤과 동생 배한(裵閑)도 간관(諫官)에 올랐고, 아들 배추(裵樞) 또한 사간원 좌헌납(左獻納)이 되어 집안이 귀현(貴顯)으로 이름이 높았다 한다.[『성산인물지』(星山人物誌)]

묘소와 후손

부인 수성 나씨는 나상지(羅尙之)의 딸로, 1남인 배추를 두었다. 배추는 1411년(태종 11) 아버지 배윤이 식년문과에 급제할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집안의 이름을 드높였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당후선생안(堂后先生案)』
  • 『성산인물지』(星山人物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