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극례(權克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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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1년(중종26)∼1590년(선조23) = 60세]. 조선명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경중(敬仲)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상주목사(尙州牧使)권박(權博)의 손자이다. 우찬성(右贊成)창녕군(昌寧君)조계상(曺繼商)의 외손자이고, 예조 참의서고(徐固)의 사위이다.

명종 시대 활동

28세이던 1558년(명종13)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과 예문관의 벼슬을 거쳐, 1565년(명종20) 사간원 정언(正言)에 올라 당시의 권신들을 탄핵하여 직언(直言)한다는 명성을 얻었다. 예조 · 병조 · 형조 · 호조의 좌랑으로 전직되었고, 세 번이나 사헌부(司憲府)로 들어가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다시 사간원으로 들어가 정언(正言) · 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1567년(명종22) 병조 정랑이 되었는데, 명종이 돌아가자 지제교(知製敎)로서 『명종실록(明宗實錄)』편수관이 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2) 이이(李珥)와 나란히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고, 1570년(선조3)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다. 뒤이어 외직으로 나가서 원주목사(原州牧使)와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차례로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581년(선조14)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좌승지(左承旨)로 승진하였다. 1583년(선조16)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86년(선조19)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1587년(선조20) 이조 참판 ·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거쳐서,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하였다.

1589년(선조22) 병조 참판 · 대사헌을 거쳐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급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그 해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판서 · 예조 판서를 거쳐서 의정부 참찬(參贊)에 올랐다. 조헌(趙憲) 등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권극례 · 권극지(權克智) 형제가 관련되었다고 탄핵하여,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로 좌천되었다. 1590년(선조23) 60세의 나이로 돌아갔다.

사후 추모와 유적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북쪽 천천(泉川)에 있고, 권극지의 사위인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기축록(己丑錄)』
  • 『월사집(月沙集)』
  • 『상촌집(象村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계갑일록(癸甲日錄)』
  • 『문소만록(聞韶漫錄)』
  • 『혼정편록(混定編錄)』
  • 『미암집(眉巖集)』
  • 『오리집(梧里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