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두(幞頭)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9일 (토) 20:46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경관직(京官職) 및 향리(鄕吏)공복(公服)에 쓰는 관.

개설

『경국대전』예전(禮典) 의장조(儀章條)를 보면, 1품에서 9품까지 공복에 복두를 썼으며, 향리가 공복에 복두를 쓴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복두에 대한 논의가 자주 거론되고 있어 조선시대 복두의 변화와 사용 예를 찾아볼 수 있다.

1405년(태종 5) 사알(司謁)·사약(司鑰)·서방색(書房色)·무대(舞隊)의 관복을 보면, 사알과 사약 5, 6품(品)은 복두·청포(靑袍)·각대(角帶)·조화(皂靴)를 착용했고, 서방색 5, 6품은 참외(參外)와 같이 녹삼(綠衫)에 복두를 썼으며, 무대는 채화복두(綵畫幞頭)·청포·각대·조화를 착용했는데 모두 홀(笏)은 없다고 하여 이들의 관모가 복두였음을 알 수 있다(『태종실록』 5년 9월 29일).

1428년(세종 10) 종묘 제향 시 세자궁 시위별감과 소친시(小親侍)는 자줏빛 옷을 입고 복두를 쓰게 하였으며(『세종실록』 10년 1월 9일), 1432년(세종 14) 악학(樂學)에서 아악서(雅樂署)전악(典樂)의 관복과 전악서(典樂署)전악의 관복에 차등을 둘 것을 아뢰었는데, 전악의 관모는 모두 복두를 썼다(『세종실록』 14년 12월 19일). 이상으로 복두는 문무관의 공복 및 사알·사약·서방색·무대의 관복에 썼으며, 세자궁의 시위별감과 소친시의 공복에도 착용하였음이 확인된다.

복두는 평시에는 공조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조정에서 비급하는 것으로, 1596년(선조 29) 호조가 알성시 급제자의 관대·홍패 등에 관해 아뢴 내용에서 확인된다(『선조실록』 29년 10월 11일). 그 후 1601년(선조 34) 조정에서 왕에게 하례할 때는 응당 공복을 입어야 하는데, 초초한 백관들의 관복도 겨우 갖추는 형편이어서 복두나 포(袍)·홀은 열에 한둘도 없다고 하여 선조 이후 공복에 복두를 착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1733년(영조 9) 대사성(大司成) 조명익(趙明翼)이 유생의 의제(衣制)로 분포(粉布)·청금(靑衿)과 복두를 평상시 재(齋)에 거처할 때 복색(服色)으로 하고, 생원·진사의 신방(新榜)에도 역시 이 예(例)를 쓰되, 한 가지 연꽃을 복두의 뒤에 마름질해 붙이며, 생원과 진사 시험에 모두 합격한 자는 두 가지의 연꽃을 붙여서 구별하였다가 3일 후에 그 꽃을 떼는 중국의 제도를 좇아 행할 것을 청하였는데(『영조실록』 9년 5월 28일), 이후 1746년(영조 22)에 생원·진사의 창방(唱榜) 때에 복두·난삼(襴衫)을 착용하는 제도를 비로소 정하였다(『영조실록』 9년 5월 28일).

1734년(영조 10) 교리(校理) 유최기(兪最基)는 난삼과 복두는 바로 중국의 제도로서,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연경에 갔을 때 구해와 그 제도를 알게 되었다 했다. 예를 좋아하는 가문에서는 자못 관례 할 때에 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여 복두는 생원·진사가 평상시뿐만 아니라 신방과 창방에 착용하였으며, 관례 시 초가(初加)에는 입자(笠子)·단령(團領)·도아(絛兒), 재가(再加)에는 사모(紗帽)·단령·각대, 삼가(三加)에는 복두·공복을 착용했다고 한다(『영조실록』 10년 4월 20일).

1884년(고종 21) 의복제도에 반대하는 대신들의 차자(箚子)에 대하여 답하기를, 홍색과 녹색의 공복은 본래 상복과 같지 않으므로 공복에는 복두와 야대(也帶)를 착용하고, 상복에는 사모와 품대(品帶)를 착용하는 것이라고 하여, 한말까지 복두는 공복에 착용하는 관모로 그 명맥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복두의 전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잡지(雜誌)」 색복 조에 나와 있는데, 신라 834년(신라 흥덕왕 즉위) 복식 사치에 대한 금제를 하교하면서 인간에게 상하의 구분과 계급의 존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복에도 구분이 있는데 사치와 화려함을 다투어 기이한 물건을 숭상하고 토산물의 속됨을 싫어하므로 예의가 처참하게 되었음을 개탄하고 있다.

또 풍속이 허물어짐은 오랑캐를 능가하기에 이르렀으니 감히 구장(舊章)을 좇아 천명을 밝히는 것이나 혹 법을 범하면 형벌로 다스릴 것이라고 하면서, 진골대등은 복두를 임의로 하고, 6두품의 복두는 세라시견포(繐羅絁絹布)를 쓰며, 5두품의 복두는 나시견포(羅絁絹布)를 쓰고, 4두품의 복두는 사시견포(紗絁絹布)를 쓰며, 평인의 복두는 견포를 쓰도록 하였다. 이로 미루어볼 때 이 이전부터 복두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복두는 중국에서 생겨난 관모로서, 신라진덕여왕 이후 당제(唐制)를 습용하면서 통일신라시대에는 상하 모두 복두 일색이 되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왕으로부터 문무백관에 이르기까지 공복에 착용하였으며, 1252년(고려 고종 39) 최항(崔沆)의 창두(蒼頭)에게 복두의 착용을 허락하면서부터 권세 있는 양반의 가노들도 쓰게 되었다.

조선시대인 1426년(세종 8) 예조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에서 올린 관복제도를 보면 문무관으로 왕께 알현하거나, 사은 또는 부임 전에 배사 시 공복에 복두를 착용하였다고 한다(『세종실록』 8년 2월 26일). 또 1432년(세종 14) 행차할 때 별감의 복두가 조관(朝官)과 같으므로 복두의 각을 내려뜨리게 하자는 건의에 따라 복두의 각을 아래로 내려뜨렸으며(『세종실록』 14년 8월 7일), 1472년(성종 3) 향리들의 관복이 각각 달라 불편하므로 『경국대전』에 실려 있는 대로 공복은 복두를 쓰고 평상복은 흑죽방립(黑竹方笠)을 쓰게 하였다고 나와 있다(『성종실록』 3년 8월 13일).

1428년(세종 10)에는 예조에서 관작이 있는 자의 시향 복장을 복두가 아닌 사모와 품대로 하자고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살펴보니, 당나라 제도에 1품 이하의 시향(時享)에는 주인 이하는 공복으로 참사한다고 하였고, 『문공가례(文公家禮)』에는 ‘정지(正至)·삭망(朔望)에는 참알(參謁)한다’ 하였으며, 주인 이하는 복두·공복·대(帶)·화(靴)·홀을 갖추고, 진사(進士)는 복두와 난삼대를 착용하며, 처사(處士)는 복두와 조삼대(皂衫帶)를 착용하고, 벼슬이 없는 자는 통모자(通帽子)와 삼대(襂帶)를 착용하며, 또 이것도 갖출 수 없다면 심의(深衣)나 양삼(涼衫)을 쓴다고 하였다(『세종실록』 10년 11월 16일).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대부(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의 시향제의(時享祭儀)에는 관복을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관작이 있는 자는 시향에 모두 사모와 품대를 착용하게 할 것을 건의하자 왕이 이를 따랐다. 그 후 1601년(선조 34) ‘왕을 하례할 때에는 의당 공복을 입어야 하는데, 지금은 초초한 백관들의 관복도 겨우 갖추는 형편’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복두는 공복에서 자취를 감추고 사모의 하나로서 공·상복에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고 유생의 관복으로 급제한 뒤에 착용하는 관모로서 한말까지 유지되었고, 이서(吏胥) 계급에게는 유일한 관모이기도 하였다.

형태

『송사(宋史)』 여복지(輿服志)를 보면 복두는 일명 ‘절상건(折上巾)’이라 하였는데, 후주(後周)에서는 부드러운 비단[軟帛]으로 되어 각이 아래로 내려와 있으며[垂脚], 수나라에서는 오동나무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당나라에서는 증(繒) 대신 라(羅)를 사용하였는데, 다만 황제의 복두는 각이 위로 굽고 신하의 것은 아래로 내려뜨렸다. 오대에서는 점점 평직이 되어 군신이 통용하였는데, 여(轝)를 탈 때는 위로 구부리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등나무에 풀을 엮어서 안을 만들고, 사(紗)는 겉을 만들어 그 위에 칠을 하였다. 그다음에는 칠을 단단하게 하고 등속을 제거하며, 앞을 한 번 접고 철사로 양 각을 평평하게 하였다고 한다.

1426년(세종 8) 예조와 의례상정소에서 조사한 조정의 관복 제도를 보면, 복두는 칠사(漆紗)로 만들었으며 그 길이는 1자 2치이고 2등 전각(展角)을 썼다고 되어 있다. 이로 보아 송나라의 복두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말의 복두는 사각형으로 모체가 방형으로 변화하였다.

용도

문무관의 공복 및 사알·사약·서방색·무대의 관복에 썼으며, 세자궁의 시위별감과 소친시의 공복에도 착용하였다. 또한 전악의 공복에도 썼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송사(宋史)』
  • 고광림, 『한국의 관복』, 화성사, 1990.
  • 유희경, 『한국복식사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