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深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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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심의 |
한글표제 | 심의 |
한자표제 | 深衣 |
상위어 | 법복(法服), 예복(禮服), 포(袍) |
하위어 | 조대(絛帶) |
관련어 | 대대(大帶), 복건(幅巾), 채조(采絛) |
분야 | 생활·풍속/의생활/의복 |
유형 | 의복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조선 |
집필자 | 이은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심의(深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13년 1월 18일, 『중종실록』 14년 7월 17일 |
의(衣)와 상(裳)이 연결된 흰 웃옷에 검은 선을 두른 유학자의 옷.
개설
심의(深衣)는 고대 중국에서 비롯된 옷으로, 고려말 주자학의 전래 이후로 유학자들이 입은 포(袍)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심의를 입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사(高麗史)』예종조에 왕이 심의를 입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편복으로 심의를 입은 기록이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양반 계급에서는 도포를 주로 착용하였으나, 유학자들은 심의를 법복으로 즐겨 평상시에 입었다.
심의는 의(衣)와 상(裳)이 연결된 흰색 바탕에 검은 선을 두른 특징이 있다. 어떠한 깃 형태이든 옷이 풍성하여 몸을 깊이 쌀 수 있다고 하여 ‘심의(深衣)’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옷의 형태와 치수에 있어서 유교의 이념이 표현되어 있다. 상의는 하늘[乾], 하상은 땅[坤]을 상징하였으며 12폭으로 이루어진 상(裳)은 1년 12달을 상징한 것이다. 가장자리에 선을 두른 것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공경을 뜻한다. 심의를 입을 때에는 검은 복건(幅巾)을 쓰고 대대(大帶), 채조(采絛)를 함께 착용하였다.
유학자들은 사망 후 심의를 수의로 사용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수의로 입은 심의가 다수의 출토된 바 있으며 대표적인 사례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의 이익정 묘의 경우이다. 심의를 비롯하여 복건, 대대, 조대(條帶) 일습이 출토되었다.
연원 및 변천
심의는 중국 민족의 기본 복식으로 알려져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책인 『예기(禮記)』에 “옛날에 심의는 대개 제도가 있어”라고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예기』가 저술되었을 때 이미 심의는 옛날부터 있어온 복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사』예종조에 심의를 왕의 제복(祭服)으로 사용한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심의가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주자학이 도입되고 고려시대 인물인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에는 심의를 착용한 모습을 볼 수 있어, 고려말의 유학자들의 복식으로 심의가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16~17세기에는 성리학의 발전과 더불어 유학자들의 법복(法服)으로 숭상되면서 심의 제도가 중요한 논의 대상이 되었다. 18세기 이후 실학자들은 심의제에 관한 연구와 착용법에 대해 자신의 문집에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실학자들은 심의의 제도와 연원, 재단법, 봉제, 착용 형태 등에 대한 철처한 고증을 거쳐 각각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옷을 마름질하기 위한 척(尺)부터 제시되어 있을 정도로 깊이 논의되었고, 각자의 변증설이 있다. 학자들의 심의에 관한 설(說)은 깃[袷], 선단[緣], 여밈[續衽絇邊]에 관한 해석에 따라 『가례(家禮)』, 『예기(禮記)』를 따르는 두 경향으로 나누어진다. 일반적으로 심의는 앞뒤 길이 4폭에 치마는 12폭이다. 겹(袷), 즉 깃의 형태는 3종류가 있다. 곧은 깃 형태로 깊이 여며지는 직령형(直領形), 곧은 깃이나 여며지지 않고 맞닿는 대금형(對襟形), 깃 둘레가 사각형 모양으로 파인 방령형(方領形)으로 나눌 수 있다. 연(緣) 또한 연의 너비와 수구 끝에 다는 형태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가장 논란이 많은 속임구변(續衽絇邊)은 해석에 따라 다른데, 최근 출토된 경기도박물관 소장 김확(金矱) 묘에서 수습된 심의는 신식(申湜)의 『가례언해(家禮諺解)』에 수록된 것과 같이 심의의 하상 진동 아래 옆선의 시접이 겉으로 드러나게 처리되어 있다.
형태
심의는 백포(白布)로 의 4폭과 상 12폭을 재단하여 연결한 옷으로 원몌(圓袂), 방령(方領), 곡거(曲裾), 속임구변(續衽具邊), 흑색 선장식[黑緣] 등의 형태적 특징을 지닌 학자의 옷이다. 상의와 하의가 연결되어 있어서 철릭과 같은 계통의 옷으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기원은 전혀 다른 옷이다. 깃과 소매부리, 옷단 가장자리에 검은 선이 둘러져 있다. 심의 제도의 특징인 ‘곡겹(曲袷)’과 ‘속임구변(續衽鉤邊)’의 해석상의 차이로 인하여 여러 형태로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의 심의는 대체로 세 가지 형태의 깃 모양이 즐겨 사용되었다. 하나는 깃에서 도련까지 곧게 내려가는 형태로 『가례』에 제시되어 있는 형태이다. 입었을 때는 깃이 여며져서 곡령(曲領)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섶을 달아 애초에 깃이 교임이 되도록 제작한 것이며 마지막의 것은 깃을 각이 지게 만들어 굽은 곡령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는 남인 계통의 유학자들이 흔히 사용하였다. 세 유형 모두 깃 부분의 제작 방식은 다르지만 착장 시에는 모두 옷고름을 달아 교임(交袵) 방식으로 입었다. 그 위에 대대(大帶)를 매고 대대에 채조대(彩絛帶)를 걸어 장식하였다.
유학자들의 초상화를 통해 심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고려말 인물인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가 있으며, 조선시대 인물의 것으로는 송시열(宋時烈), 이재(李縡), 허전(許傳),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황현(黃玹), 최익현(崔益鉉)의 초상화가 대표적이다.
예서에는 심의를 입을 때 복건과 대대, 채조 등을 함께 착용한다고 하였는데, 복건이 대표적인 심의용 관모이기는 하지만 초상화를 보면 다양한 관모가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퇴계집(退溪集)』에는 김취려(金就礪)가 복건과 심의를 보냈는데, 복건이 승건(僧巾)과 같아서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정자관을 썼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처럼 심의에는 복건 외에 사방건(四方巾)이나 동파관(東坡冠), 와룡관(臥龍冠), 장보관(章甫冠), 치포관(緇布冠) 등을 사용하였으며, 모관(毛冠)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허리에는 흰색 바탕에 가장자리에 검정색 연(緣)을 두른 대대(大帶)를 두르고 동심결 위에 오색실로 짠 채조를 끼워 내려뜨렸다.
용도
『고려사』에는 1106년(고려 예종 1)에 예종이 심의를 입고 숙종 제사에 참여한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고려말 주자학이 전래된 이래로 왕 이하 유학자의 연거복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발전과 더불어 유학자들의 법복(法服)으로 숭상되었다.
연산군 때 왕이 삼전(三殿)에 문안드릴 때와 우제(虞祭) 때 심의 착장이 언급되었다. 1518년(중종 13)에는 왕이 이학(理學) 관련 글을 읽을 때는 심의를 입는 것이 좋다는 내용이 보이며(『중종실록』 13년 1월 18일) 이듬해인 1519년(중종 14)에는 왕이 편전에서 심의를 편복(便服)으로 입어도 무방하다는 내용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의 왕 역시 심의를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중종실록』 14년 7월 17일).
『사례편람(四禮便覽)』에는 유자(儒者)들이 관례(冠禮), 상례(喪禮), 제례(祭禮) 때 심의를 착용하도록 하였는데 특히 관례 때는 주인이 주례를 청할 때 심의를 입고 주례의 집을 찾아가며, 관례 시 초가(初加) 때 관례자가 심의를 착용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상례의 초혼(招魂) 때, 입관 전에 남자들이 입는 옷으로 사용되었으며 망자의 습의(襲衣)로도 사용되었다. 그 외 제례 때에도 심의를 사용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현대까지도 지역에 따라 유교식 제례를 올릴 때 심의를 착용하는 집안이 있다. 그리고 2007년에 타계한 영남의 마지막 유학자라고 일컫은 이우섭(李雨燮)의 상례 때는 심의가 수의로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퇴계집(退溪集)』
- 김영숙, 『한국복식문화사전』, 미술문화, 1998.
- 김정자, 「심의구성에 관한 연구」, 『한국복식』제8호, 1990.
- 정혜경, 『심의』, 경남대학교출판부, 199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