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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4 기준 최신판



임진왜란 중인 1594년 왜군에 대항할 군대를 확보하기 위해 지방에 신역(身役)이나 벼슬이 없는 15세 이상의 양반과 양민, 천민을 뽑아 조직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지방군.

개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던 1594년(선조 27), 조선 정부는 군사력의 확보를 위해 중앙군으로 포수(砲手), 살수(殺手), 사수(射手)로 구성된 삼수병(三手兵)을 근간으로 하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였으며, 지방군은 신역이나 벼슬이 없는 15세 이상의 양반과 양민 및 천민을 뽑아서 속오군을 조직하였다.

속오군은 상비군으로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군포(軍布)를 바치게 하고 일정한 기간만 군사 훈련을 하는 예비 병력의 성격을 지닌 군대였다. 다만 이들은 전쟁과 내란 같은 유사시에만 동원되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속오군은 군역을 면제받았던 일부 양반 계층에게 군역을 부담시켜 국가의 조세와 군액 증가에 일정한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속오군은 임진왜란이라는 비상시에 동원 가능한 국가의 모든 병력과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설치되었다.

내용 및 특징

속오군은 신역의 유무와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군사 조련을 감당할 만한 자들로 편성하여 위급한 임진왜란을 극복하려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그런데 병조에서는 속오군을 교체상번(交替上番)시켜서 부역군(赴役軍)으로 이용하는 폐단을 야기하였다. 이에 따라 속오군들이 상번하기 위해 조총(鳥銃)과 궁전(弓箭)을 다 팔아 식량을 장만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의복까지도 팔았으며, 심한 경우는 저자와 마을에서 걸식을 하는 사태까지도 발생하였다.(『선조실록』 30년 11월 16일).

속오군은 농사일을 하던 백성을 몰아다 사람 수를 따져 병적(兵籍)에 편입시켜 억지로 군병이라 부르며 일시의 급한 전쟁을 구제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을 정군(正軍)의 예에 따라 교대로 상경시켜 관역(官役)에 응하게 한 것이다(『선조실록』 30년 11월 21일). 결국 지방의 속오군은 훈련을 하지 않은 명칭만의 군대일 뿐 실제로는 적과 싸울 수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선조실록』 31년 1월 23일).

속오군이 군사훈련이 부실한 것과 함께 역(役)이 정군(正軍)보다 갑절이 되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속오군은 원래 본래의 역이 있고 보솔(保率)이 없었는데, 한 가정 안에서도 부자 형제의 수를 헤아려 충정(充定)하므로 늙은이나 어린아이까지도 편입되는 폐단을 가져왔다(『선조실록』 32년 4월 8일). 그 결과 백성들은 속오군에 편입되는 것을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한 것으로 여겨 힘이 있는 자는 벗어나려고 도모하고 외롭고 힘없는 자는 붙들려 가는 실정이었다(『선조실록』 34년 4월 18일). 속오군은 그 문제점이 인조대에도 지속되었으며(『인조실록』 5년 3월 26일), 부자들은 뇌물로 모면하고 가난한 자들은 도망쳐 피하게 되었다(『인조실록』 8년 1월 26일).

속오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속오군의 원안(原案) 중에 노쇠한 군사는 제외하고 장정(壯丁)만을 가려 뽑고, 그중에 기예(技藝)가 성취되어 번번이 1등인 자에게는 전세(田稅)를 제외한 1결을 복호시켜 주며, 노쇠한 군병은 따로 한 부대를 만들어 군량을 돕거나 장비를 마련하여 공급하게 하는 방안이 강구되었다(『인조실록』 5년 4월 20일). 그리고 감영(監營)·병영(兵營)과 각 아문(衙門)의 소속(所屬)을 막론하고 베 1필을 바친 양민은 모두 장정으로 가려서 속오군에 충원하여 무학(武學)이라 이름을 붙이고, 공사천으로 일찍이 속오군이 된 자는 무학의 보인(保人)을 만들어 각각 1보(保)만 주어 3두의 쌀을 비급(備給)하여 조련(操鍊) 때 식량을 돕게 하는 개선안이 제시되기도 했다(『경종실록』 1년 8월 5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제의 개혁이 왕성하던 영·정조대에도 속오군의 폐단은 지속되었다. 영조대에는 각 도의 속오군이 아침에 편성하면 저녁에 흩어져 10명 가운데에서 7~8명이 도망하여 습조(習操)할 때가 되면 사람을 사서 대립(代立)하여 군대로서의 대오를 이루지 못하였다(『영조실록』 52년 2월 8일). 정조대에는 군역의 대상이 아닌 아동들을 속오군에 배정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호남(湖南)의 속오군에 있던 아동초(兒童哨)이다. 아동초는 말 그대로 아동을 군적(軍籍)에 넣은 것이었다. 이들은 10세에서부터 14세의 아동들로, 선발된 아동들로 초(哨)를 만들고 아동초라고 하였다(『정조실록』 3년 2월 25일).

변천

순조대에도 속오군은 모두 지극히 가난하여 의뢰할 바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속오군의 조성과 운영이 이루어진 것은 농민을 이용한 향군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훈련도감을 비롯한 중앙군과 속오군의 기본 근간은 척계광(戚繼光)의 전법을 수용하면서 만들었다. 그리고 척계광이 향곡(鄕曲)의 우매한 군졸도 시정(市井)의 교활한 무리보다 좋다는 말에 근거하여 속오군을 모집하였다(『순조실록』 8년 8월 1일).

고종대에 이르면 속오군에 편입된 군사들이 일정한 시험을 거쳐 직부회시(直赴會試)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이때 속오군의 시험은 각 지방의 병영에서 거행되었다. 병영에서는 해당 지방의 병사가 지역의 속오군을 모두 모아놓고 시취(試取)하여 우등한 2인에게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고 그다음 1인에게 직부회시하도록 하였다. 시험은 화포과(火砲科), 유엽전(柳葉箭), 편전(片箭), 기추(騎芻), 조총(鳥銃) 등의 다섯 가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 어느 한 가지 기예에서 만점을 맞은 경우에도 모두 직부하도록 했다(『고종실록』 4년 4월 13일). 고종대의 속오군 시험은 군사의 질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중앙에서 벼슬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를 준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고종대 지방의 속오군도 기존의 문제를 답습하는 부분이 있었다. 지방의 수령들이 속오군에 결원이 발생해도 전혀 보충하지 않으며, 봄가을에 모아놓고 점고하는 일도 이유 없이 정지해 버린 것이다(『고종실록』 15년 7월 19일).

반면 고종대에는 속오군이 실질적인 군사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1866년 병인양요가 발발했을 때 강화도로 통하는 육로(陸路)의 요충지를 경계하는 임무를 이들이 담당하였다. 당시 양주목사(楊州牧使)가 속오군 200명을 거느리고 여현(礪峴)에서 적의 침입을 막는 임무를 수행했다. 따라서 속오군이 명목상의 군대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유사시에는 예비군의 역할도 계속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고종실록』 3년 9월 10일).

의의

속오군은 임진왜란 이후 지방의 군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조선시대 군역의 폐단과 같이 허수만 있고 실제는 없는 문제점도 있었지만, 신분에 관계없이 양반에서부터 노비에 이르는 사회의 전 계층이 속오군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국민개병제와 같은 제도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당시 사회 구성원에게 국방의 의무를 면제받던 양반까지 군역을 부담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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