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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0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궁중의 외연(外宴)에서 무동(舞童)들이 행하던 춤과 노래, 또는 무동 그 자체.

개설

남악(男樂)은 여악(女樂)과 대칭되는 용어이다. 대개 연향(宴享)에서 춤과 노래를 담당한 남자 아이들, 즉 무동을 가리킨다. 무동은 남자들 잔치인 외연에 쓰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여기(女妓)들이 담당하였던 춤과 노래를 대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남악의 주축을 이루는 무동은 천민 및 양인층을 대상으로 8세에서 15세 이하의 아이들 중에서 뽑혔다. 이들에게는 급료로 의복과 양식·초료(草料) 등이 주어졌다. 또 봉족(奉足)·솔정(率丁) 2인이 주어졌고, 연회 시에는 상으로 물품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무동은 주로 기우제(祈雨祭)·회례연(會禮宴)·양로연(養老宴)·진연(進宴)·사객연(使客宴)에 출연했다. 다만, 기우제와 관련해서는 예종조까지 기록이 보이다가 그 이후로는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동과 기우제의 관계는 일시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회례연과 관련해서는 『문종실록』·『성종실록』·『영조실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정의 엄숙하고 경건한 예이므로 여악을 쓰는 것이 옳지 않다는 내용(『성종실록』 4년 1월 9일), 나이가 많은 종신(宗臣)·조신(朝臣)·사서인(士庶人)들을 불러 모아 음식과 무동을 내려주었다는 내용(『영조실록』 51년 12월 29일) 등이 그것이다.

진연은 외진연과 내진연으로 나뉜다. 남성들을 위한 잔치인 외진연은 주로 무동이, 내진연은 여기들이 노래와 정재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순조 때의 진연에서는 내연(內宴)임에도 불구하고 무동들이 정재를 담당한 기록이 나타나기도 한다.

사객연은 중국에 대한 사대와 일본·유구국 등에 대한 교린을 위하여 각 나라의 사신들에게 베푸는 잔치이다. 이 잔치에 무동들이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중국 명나라 사신과 왜·야인을 위한 잔치에 참여하였다.

『세조실록』이나 『영조실록』·『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성균관 유생들을 위한 잔치나 문·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을 위한 사연에도 무동들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춘광호(春光好)·초무(初舞)·광수무(廣袖舞)·처용무(處容舞) 등을 담당하였다.

변천

남악은 여악의 폐단이 지적되며 그 실시가 요청되었다. 1430년(세종 12)에 김종서가 여악을 폐지할 것을 아뢰었고(『세종실록』 12년 7월 28일), 1432년(세종 14)에 8세에서 10세 사이의 나이 어린 관노(官奴) 60명을 무동으로 뽑았다. 이듬해인 1433년(세종 15) 정월 초하루 회례연에서 처음으로 무동이 몽금척(夢金尺)·오양선(五羊仙)·아박(牙拍)·무고(舞鼓) 정재를 공연했다. 그러나 무동은 재주가 익숙해질 만하면 곧 장정이 되기 때문에 남악제도가 지속되기 어려웠다.

성종대에도 정전(正殿)에서 베푸는 연향 때 남악을 쓰자는 요청이 있었으나(『성종실록』 23년 1월 4일), 남악을 쓰는 것은 잘 시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전기에는 1433년 이후 대략 20여 년간과 1511년(중종 6) 이후 10여 년만 외연에 남악을 썼고, 그 외의 기간에는 외연이라도 여악을 썼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면서 연향에서 여악을 쓰는 것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1625년(인조 3)에 왕세자가 책례(冊禮) 후 행하는 회백관례(會百官禮)에 남악을 미리 연습시킬 것이 건의된 내용을 보면(『인조실록』 3년 1월 4일) 1623년의 인조반정 후 외연에 남악을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657년(효종 8) 12월에 자전(慈殿)에게 진연을 올렸을 뿐, 외연을 베푼 기록이 없으며, 현종대에도 외연을 연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1705년(숙종 31)에 숙종의 즉위 30년을 경축하기 위한 진연을 열고자 하였을 때, 외연에도 여악을 쓸 것을 청하는 자가 있었으나, 대체로 숙종대의 많은 조관(朝官)들은 여악은 내연에만 써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1705년 이후에는 외연에 여기가 아니라 무동이 춤을 추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참고문헌

  • 김종수, 「조선 17·18세기 여악과 남악」, 『한국음악사학보』 11, 1993.
  • 오혜경, 「조선시대 무동복식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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