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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수는 나이 15~16세에 이미 문명이 있더니, 1795년(정조 19)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다. 1806년(순조 6)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고, 5월에 [[대교(待敎)]]가 되었다. 1809년(순조 9) 3월 한림소시(翰林召試)를 행할 때 뽑혔다. 1814년(순조 14) 무렵에는 [[수찬(修撰)]]이 되었고, 그 해 『정종대왕어제(正宗大王御製)』와 『열성어제(列聖御製)』를 인쇄할 때 참여하여 그 공으로 상을 받았다. 1816녀(순조 16) 10월 서장관(書狀官)이 되었고, 1817년(순조 17) 9월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1818년(순조 18) 4월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1822년(순조 22) 8월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며, 9월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12월에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 박기수는 나이 15~16세에 이미 문명이 있더니, 1795년(정조 19)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다. 1806년(순조 6)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고, 5월에 [[대교(待敎)]]가 되었다. 1809년(순조 9) 3월 한림소시(翰林召試)를 행할 때 뽑혔다. 1814년(순조 14) 무렵에는 [[수찬(修撰)]]이 되었고, 그 해 『정종대왕어제(正宗大王御製)』와 『열성어제(列聖御製)』를 인쇄할 때 참여하여 그 공으로 상을 받았다. 1816녀(순조 16) 10월 서장관(書狀官)이 되었고, 1817년(순조 17) 9월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1818년(순조 18) 4월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1822년(순조 22) 8월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며, 9월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12월에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 ||
− | 1823년(순조 23) 1월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는데, 부호들의 옥사(獄事)와 간범자(干犯者)들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실효를 거두었다. 또 선비들을 시험하여 효행이 있고 마음이 결백한 자들을 천거하였다. 1825년(순조 25) 2월 하의도(荷衣島)에 표류한 중국인들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배에 실린 철물(鐵物) 3천여 근이 성책(成冊)에서 누락되는 일이 발생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1826년(순조 26) 3월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가 10월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827년(순조 27) 1월에는 김교근( | + | 1823년(순조 23) 1월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는데, 부호들의 옥사(獄事)와 간범자(干犯者)들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실효를 거두었다. 또 선비들을 시험하여 효행이 있고 마음이 결백한 자들을 천거하였다. 1825년(순조 25) 2월 하의도(荷衣島)에 표류한 중국인들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배에 실린 철물(鐵物) 3천여 근이 성책(成冊)에서 누락되는 일이 발생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1826년(순조 26) 3월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가 10월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827년(순조 27) 1월에는 김교근(金敎根) 등과 함께 비변사 제조(備邊使提調)에 차임(差任)되었다. 그 해 3월에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는데, [[세자(世子)]]에게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기를 진달하였고, 5월에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
1828년(순조 28) 7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8월에 입지(立志)·근학(勤學)·납충직(納忠直)·진기강(振紀綱)·숭절검(崇節儉)·근천계(謹天戒)·휼민은(恤民隱)의 7조(條)를 진달하였다. 그 해 12월에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1829년(순조 29) 1월에 이조 참판이 되었다. 1830년(순조 30) 2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고, 그 해 4월 1일 형조 판서가 되었다가 같은 달 20일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6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 그 해 8월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는데, 9월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11월에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831년(순조 31) 1월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었다가 2월 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가 되었다. 1832년(순조 32) 윤9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그 해 11월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1833년(순조 33) 8월 홍문관 [[제학(提學)]]이 되고, 11월에 우빈객(右賓客)이 되었다. 1834년(순조 34) 7월 이조 판서가 되었다. | 1828년(순조 28) 7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8월에 입지(立志)·근학(勤學)·납충직(納忠直)·진기강(振紀綱)·숭절검(崇節儉)·근천계(謹天戒)·휼민은(恤民隱)의 7조(條)를 진달하였다. 그 해 12월에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1829년(순조 29) 1월에 이조 참판이 되었다. 1830년(순조 30) 2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고, 그 해 4월 1일 형조 판서가 되었다가 같은 달 20일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6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 그 해 8월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는데, 9월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11월에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831년(순조 31) 1월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었다가 2월 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가 되었다. 1832년(순조 32) 윤9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그 해 11월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1833년(순조 33) 8월 홍문관 [[제학(提學)]]이 되고, 11월에 우빈객(右賓客)이 되었다. 1834년(순조 34) 7월 이조 판서가 되었다. |
2018년 1월 9일 (화) 22:4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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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기수 |
한글표제 | 박기수 |
한자표제 | 朴綺壽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후기 |
왕대 | 순조~현종 |
집필자 | 박은화 |
자 | 미호(眉皓) |
호 | 이탄재(履坦齋) |
시호 | 효문(孝文)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774년(영조 50) |
사망 | 1845년(헌종 11) |
본관 | 반남(潘南)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박사복(朴師復): 통덕랑(通德郞) |
조부 | 박좌원(朴左源): 박재원(朴在源) |
부 | 박종신(朴宗臣): 우부승지(右副承旨) |
모_외조 | 해주최씨(海州崔氏): 최수일(崔粹一)의 딸 |
처_장인 | 의령남씨(宜寧南氏): 남건악(南建岳)의 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기수(朴綺壽) |
총론
[1774년(영조 50)~1845년(헌종 11) = 72세]. 조선 후기 순조~헌종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판서(判書)이다. 자는 미호(眉皓)이고, 호는 이탄재(履坦齋)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증조부는 통덕랑(通德郞)박사복(朴師復)이고, 아버지는 우부승지(右副承旨)박종신(朴宗臣)이며, 어머니 해주최씨(海州崔氏)는 최수일(崔粹一)의 딸이다.
순조 시대 활동
박기수는 나이 15~16세에 이미 문명이 있더니, 1795년(정조 19)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다. 1806년(순조 6)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고, 5월에 대교(待敎)가 되었다. 1809년(순조 9) 3월 한림소시(翰林召試)를 행할 때 뽑혔다. 1814년(순조 14) 무렵에는 수찬(修撰)이 되었고, 그 해 『정종대왕어제(正宗大王御製)』와 『열성어제(列聖御製)』를 인쇄할 때 참여하여 그 공으로 상을 받았다. 1816녀(순조 16) 10월 서장관(書狀官)이 되었고, 1817년(순조 17) 9월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1818년(순조 18) 4월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1822년(순조 22) 8월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며, 9월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12월에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823년(순조 23) 1월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는데, 부호들의 옥사(獄事)와 간범자(干犯者)들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실효를 거두었다. 또 선비들을 시험하여 효행이 있고 마음이 결백한 자들을 천거하였다. 1825년(순조 25) 2월 하의도(荷衣島)에 표류한 중국인들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배에 실린 철물(鐵物) 3천여 근이 성책(成冊)에서 누락되는 일이 발생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1826년(순조 26) 3월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가 10월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827년(순조 27) 1월에는 김교근(金敎根) 등과 함께 비변사 제조(備邊使提調)에 차임(差任)되었다. 그 해 3월에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는데, 세자(世子)에게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기를 진달하였고, 5월에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1828년(순조 28) 7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8월에 입지(立志)·근학(勤學)·납충직(納忠直)·진기강(振紀綱)·숭절검(崇節儉)·근천계(謹天戒)·휼민은(恤民隱)의 7조(條)를 진달하였다. 그 해 12월에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1829년(순조 29) 1월에 이조 참판이 되었다. 1830년(순조 30) 2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고, 그 해 4월 1일 형조 판서가 되었다가 같은 달 20일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6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 그 해 8월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는데, 9월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11월에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831년(순조 31) 1월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었다가 2월 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가 되었다. 1832년(순조 32) 윤9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그 해 11월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1833년(순조 33) 8월 홍문관 제학(提學)이 되고, 11월에 우빈객(右賓客)이 되었다. 1834년(순조 34) 7월 이조 판서가 되었다.
헌종 시대 활동
1837년(헌종 3) 10월 정사(正使)가 되었다. 1838년(헌종 4) 4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7월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12월 형조 판서가 되었다. 1839년(헌종 5) 4월 공조 판서가 되고, 5월 규장각(奎章閣)제학(提學)이 되었다. 그 해 8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11월에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1840년(헌종 6) 2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4월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가 6월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 해 10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1842년(헌종 8) 3월 규장각 제학이 되고, 1843년(헌종 9) 경연(經筵)지사(知事)가 되었는데, 다섯 번이나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한 끝에 윤허를 받아 그 해 8월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1845년(헌종 11) 세상을 떠나니 향년 72세이다.
시호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는 남건악(南建岳)의 딸이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