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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시대 은거 생활'''== | =='''인조 시대 은거 생활'''== |
2018년 1월 9일 (화) 22:4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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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강익문 |
한글표제 | 강익문 |
한자표제 | 姜翼文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군우(君遇) |
호 | 당암(戇菴)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9년(선조2)「비문」 1568년(선조1)『방목』 |
사망 | 1649년(인조27)「비문」 1648년(인조26)『방목』 |
본관 | 진주(晉州) |
주거지 | 경상도 합천(陜川) |
묘소소재지 | 경상도 의령(宜寧)의 낙동강(洛東江) 서쪽 |
증조부 | 강희필(姜姬弼) |
조부 | 강인수(姜仁壽) |
부 | 강세탁(姜世倬) |
모_외조 | 선산김씨(善山金氏): 김언준(金彦俊)의 딸 |
처_장인 | 합천이씨(陜川李氏): 이후신(李後臣)의 딸→(자녀)3남 2녀 |
자녀 | (1자)강대수(姜大遂)→(자녀)2남 3녀 (2자)강대적(姜大適)→(자녀)3남 2녀 (3자)강대연(姜大延)→(자녀)2남 3녀 (1녀)이여한(李汝漢)의 처→(자녀)4녀 (2녀)정유숙(鄭惟熟)의 처 |
유명자손 | 강휘연(姜徽衍), 강휘만(姜徽萬), 강휘민(姜徽敏), 강휘중(姜徽重), 강휘망(姜徽望), 강휘정(姜徽鼎), 강휘진(姜徽晉)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강익문(姜翼文) |
총론
[1569년(선조2)~1649년(인조27) = 81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군우(君遇), 호는 당암(戇庵)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주거지는 합천(陜川)이다. 시조는 강민첨(姜民瞻)인데, 고조부 강승전(姜承顓)이 합천으로 이사하였다. 아들이 전주부윤(全州府尹)강대수(姜大遂)인데,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부자가 함께 10여 년 동안 고초를 겪었다.
선조~광해군 시대의 활동
1606년(선조39) 39세에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1608년(선조41) 성균관(成均館)학유(學諭)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設書)를 겸임하였다.
1609년(광해군1) 예조좌랑이 되어, 이후 4년 동안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세 번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고, 네 번 사헌부(司憲府)헌납(獻納)이 되었으며 여섯 번 사헌부지평(持平)이 되었고, 다섯 번 시강원(侍講院)문학(文學)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5) 사헌부장령(掌令)에서 시강원필선(弼善)으로 옮겼다가 제용감(濟用監)정(正)이 되었으며, 다시 사간원사간(司諫)이 되었다.
계축옥사의 수난
1613년(광해군5) 10월 사간으로 있을 때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대북파(大北波)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서자 출신 박응서(朴應犀), 서양갑(徐洋甲) 등의 반역을 문초하면서,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고 했다는 거짓 진술을 받아내었다. 이 진술을 근거로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하였다. 영의정이덕형(李德馨)이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였는데, 정인홍·이이첨 등이 이덕형을 형률로써 다스리려고 논의하였다. 강익문은 이 논의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정인홍의 미움을 사서 충원현감(忠原縣監)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1614년(광해군6) 광해군(光海君)이 영창대군을 죽였는데, 사간원정언정온(鄭蘊)이 상소하여 적극 반대하다가 대역(大逆) 죄인으로 몰려서 죽게 되었다. 그러자 강익문의 아들 강대수가 정언으로서 동료 정온을 구하려고 상소를 올렸다가 도리어 회양(淮陽)으로 유배당하였다. 그때 강익문은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결국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10여 년 동안 옥(獄)에 갇혀 지냈다.
인조 시대 은거 생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강익문은 그 아들 강대수와 함께 풀려났다. 아들 강대수는 관직에 진출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그는 원래 북인(北人)이었기 때문에 벼슬이 침체되었다. 1631년(인조9)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임명되었으나, 언관(言官)들이 그를 탄핵하였으므로, 아들 강대수가 상소하여 그 전말을 자세히 진술하여 아버지를 해명하였다. 이리하여 1632년(인조10)에 통례원(通禮院)봉례(奉禮)를 거쳐 다시 제용감 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많다고 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합천으로 돌아가서 한가하게 여생을 보냈다. 나라에서 80세가 넘은 노인에게 내리는 은전(恩典)에 의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49년(인조27) 노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81세였다.
성품과 일화
강익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평이 남아 있다. 그는 평생토록 화려한 집을 좋아하지 않았고, 옷은 몸에 편한 것을 아무거나 입었으며 음식은 입에 맞는 것을 아무거나 먹었다고 한다. 항상 자제들에게 경계시키기를, “늙은 애비 때문에 오욕(汚辱)을 당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성질이 성실하고 신중하여 겉모양만 꾸미기를 일삼지 않았다. 남과 함께 말할 때에는 겉으로 속마음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고, 불선(不善)한 것을 보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묘소와 추증
묘소는 경상도 의령(宜寧)의 낙동강 서쪽[洛西]에 있는데, 허목(許穆)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사후에 추은(推恩)하여 예조판서(判書)에 증직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응천일록(凝川日錄)』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동춘당집(東春堂集)』
- 『기암집(畸庵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