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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1:2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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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복궁 |
한글표제 | 경복궁 |
한자표제 | 景福宮 |
상위어 | 궁궐(宮闕) |
관련어 | 광화문(光化門), 근정전(勤政殿), 법궁(法宮), 북궐(北闕), 북악산(北嶽山), 십자각(十字閣), 왕실(王室), 정전(正殿)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조재모 |
건립시기/일시 | 1395년(태조 4) 창건, 1865년(고종 2) 중건 |
장소 | 도성(都城) |
관련 인물 | 정도전(鄭道傳),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복궁(景福宮)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4년 10월 7일,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고종실록』2년 4월 2일, 『태조실록』 4년 10월 7일, 『태조실록』 4년 9월 29일, 『태조실록』 4년 10월 7일, 『명종실록』 8년 9월 14일, 『선조실록』 26년 10월 25일, 『현종실록』 8년 윤4월 18일, 『선조실록』 38년 4월 22일, 『중종실록』 37년 11월 1일 |
조선전기에 세워진 법궁이며, 고종대 중건한 궁궐.
개설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도성의 대표적인 궁궐이다. 1395년(태조 4) 처음 건설되었고(『태조실록』 4년 10월 7일)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가(『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1865년(고종 2)의 공사를 통해 중건되었다(『고종실록』2년 4월 2일).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정면에 세워지면서 왕실 궁궐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조선물산공진회’ 등을 겪으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2011년 현재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인 배치는 고대 중국의 궁궐 배치 수법을 따르는 전형적인 형태로, 남·북 방향의 축선을 따라 주요한 문(門)과 전각이 배열되었다.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편전인 사정전(思政殿), 침전인 강녕전(交泰殿)과 교태전(交泰殿)을 중심으로 광화문(光化門), 건춘문(建春文), 영추문(迎秋門), 신무문(神武門) 등 4개의 대문이 있고 경회루(慶會樓), 자경전(慈慶殿), 자미당(紫微堂) 등의 내전 전각과 자선당(資善堂), 비현각(丕顯閣) 등의 동궁 전각 등이 있는 전체 7,000여 칸에 이르는 규모였으나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위치 및 용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하며 면적은 약 343,888㎡로 조선시대 궁궐이다.
변천 및 현황
경복궁이 처음 건설된 것은 1395년(태조 4)이다. 태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 사직과 함께 새로운 궁궐을 건설하였는데 그것이 경복궁이다. 정도전(鄭道傳)은 궁궐에 대해 국왕이 정사하는 곳이며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곳이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고 명칭을 아름답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시경(詩經)』「대아(大雅)」편에 나오는 시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이름 지었다(『태조실록』 4년 10월 7일).
태조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심덕부(沈德符), 김주(金湊), 이염(李恬), 이직(李稷)으로 하여금 도성과 궁궐을 짓는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최초의 경복궁은 연침(燕寢) 7칸, 동서이방(東西耳房) 각 2칸, 서루 5칸, 보평청(報平廳) 5칸과 이들 사이의 행랑 등이 내전(內殿)을 구성하였고, 정전(正殿) 5칸, 동서각루 각 2칸, 앞쪽의 문 등과 행각 등이 외전(外殿)을 구성하였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경복궁은 처음부터 종적인 배치의 형태로 구성되었고 정전, 보평청, 연침 등 세 동의 전각이 그 중심에 놓여 있었다. 이들 전각에는 각각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궁성을 쌓아 동문을 건춘문, 서문을 영추문, 남문을 광화문이라 이름 하였다(『태조실록』 4년 10월 7일).
그러나 태조 이후 경복궁은 사용되지 않다가 세종 즉위 이후에야 다시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정종이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태종은 한양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지만 따로 창덕궁을 건설하여 그곳에 주로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의 창덕궁 건설로 인해 조선은 두 개의 궁궐을 갖게 되었다. 이후 성종대의 창경궁, 광해군대의 인경궁과 경희궁, 고종대의 경운궁 등 여러 궁궐을 건설하면서 한양에는 다수의 궁궐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중 인경궁은 인조반정 이후 사라졌고 경희궁은 고종대부터 완전히 쇠락하여, 서울 시내에 현존하는 조선왕조의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 다섯이다.
세종은 경복궁의 많은 부분을 새롭게 바꾸었다. 세종의 경복궁 공사는 단순히 노후하거나 좁은 건축물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해당 전각에서 행할 의식의 규범을 정비하는 일과 맞물려 있었다. 1427년(세종 9) 왕세자 혼례에 관한 의식을 정비한 것과 동궁의 건립, 1429년(세종 11) 매일 아침의 조회인 상참례를 정비한 것과 사정전의 정비, 1433년(세종 15) 문소전(文昭殿) 건립과 관련 의식의 제정, 1443년(세종 25) 계조당(繼照堂) 건립과 이후 왕세자 대리청정 의식의 성립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세종대의 경복궁 정비와 왕실 의식의 정립은 경복궁이 유교적 왕실 의례의 공간으로 재탄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종대에 변경되거나 새롭게 건축된 대표적인 전각은 사정전, 강녕전, 계조당, 문소전 등이며 함원전(咸元殿), 교태전, 자미당, 종회당(宗會堂), 송백당(松栢堂), 인지당(麟趾堂), 청연루(淸燕樓) 등도 세종대에 건립되었다. 궁궐 내에 간의대(簡儀臺), 보루각(報漏閣), 흠경각(欽敬閣) 등 천문 기기를 위한 전각이 마련된 것도 이때였다. 이후 성종대를 제외하면 조선왕실은 대체로 경복궁을 중심으로 궁궐을 사용하였다. 성종은 주로 창덕궁에서 정사를 보았으며 창경궁을 건립하여 창덕궁에 부족한 내전 공간을 확충하였다.
1553년(명종 8)에는 중종대에 소실된 경복궁 동궁을 공사하던 중에 화재가 발생하여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 남기고 편전과 침전의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명종실록』 8년 9월 14일). 복구된 경복궁은 다시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든 궁궐과 종묘와 같이 소실되었고, 이후 고종대에 중건되기까지 약 270년간 폐허로 방치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경복궁이 중건되지 못한 데에는 풍수적으로 좋지 않은 땅이라는 인식도 작용하였으나 이것은 단지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제로는 민력이 많이 소요되는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국왕이 경복궁 터에 가 보거나 경복궁 근처에 작은 규모의 공사만 있어도,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는 반대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숙종대부터의 도성 정비, 정조대 화성(華城)의 건설, 순조대 창덕궁의 중건 등을 통해 보더라도 재정의 부족 이외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란 이후 경복궁 재건을 위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경복궁 터에 임시 궁궐이라도 짓자고 하거나(『선조실록』 26년 10월 25일)(『현종실록』 8년 윤4월 18일), 복구를 위해 명종대의 공사 기록을 검토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8년 4월 22일). 영조는 경복궁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자주 행차하였을 뿐만 아니라 친잠례(親蠶禮)를 행하고 기념비와 채상단(採桑壇)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다른 시설의 복구를 위해 경복궁 자재를 활용하거나 터를 침해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아 관리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하였던 듯하다.
고종대에 들어 경복궁이 중건되었다. 신정왕후(神貞王后)는 1865년(고종 2) 4월 2일 전교로서 경복궁 중건을 명하였다. 중건의 명분은 왕실의 법궁을 회복한다는 것이었고, 더불어 고종이 경복궁 중건을 염원하였던 익종의 대통을 이어받았다는 점이 부각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한 것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권력이었다. 복구공사를 거쳐 경복궁은 법궁으로 재탄생하였으나, 1873년(고종 10) 12월과 1876년(고종 13) 11월 등 얼마 되지 않아 발생한 연이은 화재로 크게 손상되었고 고종도 종종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88년(고종 25)에 이르러서야 다시 대체적인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는데, 이 공사 전후의 상황은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본 「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와 국립문화재연구소 및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북궐도형(北闕圖形)」을 통해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
국권을 침탈당하면서 경복궁도 왕조의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미 1894년(고종 31)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로 국가의 존엄성을 상실했고, 국권을 빼앗긴 이후에는 물리적으로도 급격하게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15년의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박람회가 경복궁에서 개최되어 조선의 법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경복궁의 융문당(隆文堂)은 원불교 창립관으로, 융무당(隆武堂)은 찻집으로, 자선당은 일본 도쿄의 오쿠라 미술관으로, 비현각과 홍문관은 요정으로, 선원전(璿源殿)은 박문사(博文寺)로 매각되거나 훼손되었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1917년 창덕궁 내전의 화재를 복구하는 명목으로 각각 희정당(熙政堂)과 대조전(大造殿)의 공사에 사용되었다. 또한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경복궁 정면에 들어서면서 궁궐의 권위와 조선왕실의 상징이 사라졌다.
형태
경복궁은 육조거리의 북쪽 끝 한양 도성의 중앙에 위치하였다. 남쪽에서부터 광화문, 홍례문(弘禮門) 혹은 흥례문(興禮門), 근정문(勤政門)을 거쳐 정전 근정전, 편전 사정전, 침전 강녕전과 교태전, 아미산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었다. 직선의 중앙 축 선상에 주요 건물과 문, 마당을 배열하는 것은 고대 중국의 궁궐 배치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경복궁은 조선의 궁궐 중에서 가장 원칙적인 형태의 배치를 선택한 궁궐이다.
각각의 주요 전각은 앞쪽의 문을 포함하여 행랑으로 둘러싸인 마당을 갖고 있다. 근정전의 경우에는 2중의 월대와 근정문, 동·서·남쪽의 행각으로 하나의 영역을 구성하였다. 사정전 역시 사정문과 행각이 영역을 구성하며 사정전과 함께 만춘전(萬春殿), 천추전(千秋殿)이 하나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사정전 뒤쪽으로는 강녕전, 교태전이 마찬가지로 각각의 영역을 구성한다. 강녕전 주변으로는 경성전(慶成殿), 연생전(延生殿), 연길당(延吉堂), 응지당(膺祉堂) 등 4개의 전각이 배치되어 일곽을 구성하고, 교태전 뒤편으로는 아미산이 있어 광화문 앞의 육조거리에서 시작된 직선의 남북 축이 종결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전체 영역은 크게 국가의 정치 공간인 외전과 왕실의 생활 공간인 내전으로 구분되는데, 광화문에서 사정전까지는 외전의 성격을 가지며 강녕전 안쪽은 내전으로 볼 수 있다.
근정전 축의 서편으로는 수정전(修政殿)을 비롯하여 각종 궐내각사가 배치되었다. 궐내각사에서는 근정전, 사정전 등 중심 영역의 일을 보조하며 각종 사무를 처리하였고, 궐내각사 북편에는 경회루를 놓아 사신의 접대와 연회에 사용하였다. 근정전 축의 동편으로는 비현각과 자선당,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등으로 구성된 동궁(東宮)이 위치하였다. 이 모든 영역은 영제교를 지나는 물길의 북편 안쪽으로 놓였으며, 물길 바깥쪽으로는 권위 있는 시설을 배치하지 않았다. 남서쪽에 내사복시(內司僕寺) 정도가 배치되었을 뿐이다.
아미산 북쪽과 서편으로는 자경전, 자미당, 흥복전(興福殿) 등 왕실 여성들이 사용하는 전각이 배치되었다. 그 주변으로는 왕실 내전의 생활에 필요한 각종 시설이 함께 위치하여 왕실 주요 인물의 생활을 보조하였다. 동북편으로는 선왕의 어진을 모시는 선원전이 위치하였고, 서북편으로는 태원전(泰元殿) 등 왕실의 장례에 사용되는 빈전, 혼전 용도의 전각들이 위치하였다. 향원정 주변으로 정원이 구성되었고, 그 북편으로는 건청궁 영역이 자리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북문 신무문(神武門) 밖에는 북궐 후원으로 불리는 정원이 별도로 있었다. 「북궐후원도형(北闕後園圖形)」에는 경농재(慶農齋), 수궁(守宮), 융문당, 융무당, 옥련정, 오운각, 백화실 등의 건물과 궁장, 문 등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경복궁은 『세종실록』「오례」 혹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의례의 규범을 만들 때 기준이 된 공간이다. 『국조오례의』에서는 근정전, 근정문, 사정전, 중궁의 정전인 정전, 왕세자의 정당인 정당, 혼전, 빈전 등을 의례의 주요 공간으로 정립하였다. 이 중 근정전, 근정문, 사정전은 전각의 이름을 명확히 표현하였지만 정전, 정당, 혼전, 빈전 등은 건물의 용도만을 표현하였을 뿐이다. 단, 『세종실록』의 「오례」에서는 정당 대신 자선당(資善堂)이라고 동궁의 전각 이름을 명시하였다. 『국조오례의』 의례 체계는 법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법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특히 상참 의식은 조선중기 이후 거의 명목만 남게 되었고 경연을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었다. 조회 의식의 약화와는 반대로 진연, 진찬은 대규모로 빈번하게 진행되어 내전 의식이 강화되는 경향이 컸다.
경복궁이 창덕궁 등 다른 궁궐과 다른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은 배치법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광화문에서부터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을 직선상에 배치한 것은 여타의 궁궐이 병렬적인 축을 구성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뿐만 아니라 다른 궁에는 외전과 내전의 경계적 성격을 갖고, 국왕이 독서하는 공간이자 대신들을 편하게 만나는 야대청(夜對廳)으로 종종 사용되던 건물이 있었다. 창덕궁의 희정당, 창경궁의 숭문당(崇文堂), 경희궁의 흥정당(興政堂)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경복궁에는 이러한 성격의 전각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아서 중종은 경복궁에 야대청이 따로 없음을 지적하면서 임시변통으로 동궁에 속한 비현각을 사용하기도 했다(『중종실록』 37년 11월 1일).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궁궐지(宮闕志)』「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북궐후원도형(北闕後園圖形)」
- 김동욱, 『조선시대 건축의 이해』,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 우동선 외,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 효형출판, 2009.
- 이강근, 『경복궁』, 대원사, 2003.
- 홍순민,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1999.
- 이혜원, 「경복궁 중건이후 전각구성의 변화-「경복궁배치도」와 「북궐도형」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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