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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3 판




총론

[1600년(선조 33)~1645년(인조 23) = 46세]. 조선 중기 인조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좌랑(佐郞)이다. 자는 자후(子厚)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인데, 조부는 판관(判官)박충생(朴忠生)이고, 아버지는 군수(郡守)박창(朴敞)이며, 어머니 거창신씨(居昌愼氏)는 사인(士人)신임(愼恁)의 딸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 장원으로 합격하고, 그 해에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종부시(宗簿寺)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시강원(侍講院) 설서(說書)가 되었고 이어 사서(司書)가 되었다. 이때 날마다 서연(書筵)에 나가 강론하다가 뜻이 심오한 대목을 만날 경우에는 반드시 면밀히 분석하였다고 한다. 1635년(인조 13) 12월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이 해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갔다. 박종부도 남한산성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가는 길이 막혀 강화도로 들어갔다. 당시 도원수(都元帥)김자점(金自點)은 정방(井方)에, 황해감사(黃海監司)이배원(李培元)은 장수(長壽)에 머무르면서 모두 적을 두려워하여 공격하지 못하였다. 분사(分司)의 대신들이 어사를 파견하여 장수(將帥)들을 독려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구원하게 하였으나, 모두 두려워 피하였다. 이에 박종부는 비분강개하여 장수산성에 찾아가 군사를 독려하여 적과 싸웠다. 그 뒤 누차 예조 좌랑, 병조 좌랑,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38년(인조 16)에 다시 수찬에 임명되었다가 그 해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다. 1640년(인조 18) 2월에 다시 수찬이 되었다가 교리(校理), 정언(正言), 헌납(獻納), 이조 좌랑 등을 거쳤다. 이어 김제군수(金堤郡守)로 나갔으나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병이 나 사임하고 돌아왔다. 1645년(인조 23) 6월 1일 충원(忠原)의 임시 처소에서 향년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종부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품이 온화하여 안색이나 웃음이 친근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 지조는 확고하고 탁월하여 만부(萬夫)도 빼앗을 수 없는 용맹이 있었다. 견해가 명철하여 시비가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에 조금도 한쪽으로 치우친 적이 없었다. 나이 10세에 스승에게 글을 배웠는데 총명이 남보다 매우 뛰어나 문장의 독해력이 날로 진취되었다. 조정에 나간 이후로 항상 강개한 마음을 품어 사건을 만났을 경우에는 모두 다 말하였고 말해도 되지 않을 경우에는 머무르지 않고 물러났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안산군(安山君) 서쪽 선영(先塋)의 아래에 있다. 박세채(朴世采)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심첨(沈詹)의 딸인데, 2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박순(朴錞)이고, 2자는 박윤(朴錀)이다. 1녀는 민겸(閔兼)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원만춘(元萬春)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