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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명사전|대표표제=신량|한글표제=신량|한자표제=申湸|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문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인조~현종|집필자=최양규|자= 양지(湸之) |호= 호은(湖隱) |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596년(선조 29) 1월 26일|사망=1663년(현종 4) 8월 29일|본관=고령(高靈)|주거지= 충청도 남포(南浦) |묘소소재지= 경기도 양주(楊州) 판곡리(板谷里)|증조부= 신여주(申汝柱) |조부= 신발(申撥) |부= 신응구(申應榘) |모_외조=해주 오씨(海州吳氏): 오희문(吳希文)의 딸|형제=|처_장인=성주 이씨( | + | {{인명사전|대표표제=신량|한글표제=신량|한자표제=申湸|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문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인조~현종|집필자=최양규|자= 양지(湸之) |호= 호은(湖隱) |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596년(선조 29) 1월 26일|사망=1663년(현종 4) 8월 29일|본관=고령(高靈)|주거지= 충청도 남포(南浦) |묘소소재지= 경기도 양주(楊州) 판곡리(板谷里)|증조부= 신여주(申汝柱) |조부= 신발(申撥) |부= 신응구(申應榘) |모_외조=해주 오씨(海州吳氏): 오희문(吳希文)의 딸|형제=|처_장인=성주 이씨(星州李氏): 이경(李坰)의 딸 →(자녀)3남 5녀|자녀=(1자)신필상(申必相) (2자)신익상(申翼相) (3자)신우상(申遇相) (1녀)김광식(金光烒)의 처 (2녀)구봉익(具鳳翊)의 처 (3녀)이규령(李奎齡)의 처 (4녀)신종화(申宗華)의 처 (5녀)권세경(權世經)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856|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pa_12602017_001 『인조실록』 인조 26년 2월 17일 · 3월 19일]}} |
=='''총론'''== | =='''총론'''== | ||
− | [1596년(선조 29)∼1663년(현종 4) = 68세.] 조선 후기 인조~현종 때의 문신. [[예빈시(禮賓寺)]][[정(正)]]을 지냈고 증직은 이조 판서이다. 자는 양지(湸之)이고, 호는 호은(湖隱)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남포(南浦)이다. 아버지는 좌부승지(左副承旨)신응거(申應渠)이고, 어머니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증 [[영의정(領議政)]]오희문(吳希文)의 딸이다. 영의정[[신숙주(申叔舟)]]의 둘째 아들 함길도 관찰사신면(申㴐)의 6대손이다. 풍옥헌(風玉軒)[[조수륜(趙守倫)]]의 제자이고, 청음(淸陰)김상헌( | + | [1596년(선조 29)∼1663년(현종 4) = 68세.] 조선 후기 인조~현종 때의 문신. [[예빈시(禮賓寺)]][[정(正)]]을 지냈고 증직은 이조 판서이다. 자는 양지(湸之)이고, 호는 호은(湖隱)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남포(南浦)이다. 아버지는 좌부승지(左副承旨)신응거(申應渠)이고, 어머니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증 [[영의정(領議政)]]오희문(吳希文)의 딸이다. 영의정[[신숙주(申叔舟)]]의 둘째 아들 함길도 관찰사신면(申㴐)의 6대손이다. 풍옥헌(風玉軒)[[조수륜(趙守倫)]]의 제자이고,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그를 천거하였다. 추탄(楸灘)오윤겸(吳允謙) · 현헌(玄軒)[[신흠(申欽)]] · 동토(童土)[[윤순거(尹舜擧)]]와 절친한 사이였다. |
=='''인조 시대 활동'''== | =='''인조 시대 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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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3년(인조 11) 공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는데[『승정원일기』인조 11년 6월 22일] 그의 재주를 아까워하던 이조 판서김상헌이 낭관(郎官)으로 천거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1634년(인조 12) 전라도구례현감(求禮縣監)으로 나갔는데[『명재유고(明齋遺稿)』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濟用監正申公行狀)」] 구례현감신량이 선정(善政)을 베풀어서 고을 사람들이 청원하여 현감을 연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청(淸)나라 군사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인조의 항복을 받고 주전파(主戰派)의 우두머리 김상헌을 잡아갔으나, 전라도 구례 지방은 무사하였다. 1638년(인조 16)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충청도 남포(藍浦) 옛 동네로 돌아왔다. 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 정의(正義)가 사라졌다고 한탄하였다. 이때부터 과거를 보기 위한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다시 벼슬길에 나가려는 뜻이 없어졌기 때문이다.[『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 1633년(인조 11) 공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는데[『승정원일기』인조 11년 6월 22일] 그의 재주를 아까워하던 이조 판서김상헌이 낭관(郎官)으로 천거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1634년(인조 12) 전라도구례현감(求禮縣監)으로 나갔는데[『명재유고(明齋遺稿)』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濟用監正申公行狀)」] 구례현감신량이 선정(善政)을 베풀어서 고을 사람들이 청원하여 현감을 연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청(淸)나라 군사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인조의 항복을 받고 주전파(主戰派)의 우두머리 김상헌을 잡아갔으나, 전라도 구례 지방은 무사하였다. 1638년(인조 16)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충청도 남포(藍浦) 옛 동네로 돌아왔다. 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 정의(正義)가 사라졌다고 한탄하였다. 이때부터 과거를 보기 위한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다시 벼슬길에 나가려는 뜻이 없어졌기 때문이다.[『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 ||
− | 1639년(인조 17)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 익위(翊衛)에 임명되었다가, 1640년(인조 18) 금산군수(金山郡守)가 되었다.[『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군수신량이 선정을 베풀자, 구례현감 때처럼 금산 고을 사람들이 청원하여 군수를 연임하였다. 1644년(인조 22) 호조 [[정랑(正郞)]]이 되었는데, 청나라에 사로잡혀 갔던 김상헌이 돌아와서 그를 정랑으로 천거하였기 때문이다. 1645년(인조 23) 충청도태안군수(泰安郡守)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퇴계(退溪)이황( | + | 1639년(인조 17)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 익위(翊衛)에 임명되었다가, 1640년(인조 18) 금산군수(金山郡守)가 되었다.[『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군수신량이 선정을 베풀자, 구례현감 때처럼 금산 고을 사람들이 청원하여 군수를 연임하였다. 1644년(인조 22) 호조 [[정랑(正郞)]]이 되었는데, 청나라에 사로잡혀 갔던 김상헌이 돌아와서 그를 정랑으로 천거하였기 때문이다. 1645년(인조 23) 충청도태안군수(泰安郡守)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퇴계(退溪)이황(李滉)처럼 벼슬할 뜻이 없어서 언제나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마지못하여 부임하였다가 곧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혹시 그가 부득이하여 관직에 나아갔더라도,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즉각 사임하고 벼슬에 연연해하지 않았다.[『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
1648년(인조 26) 2월 홍청도(洪淸道)와 전라도 두 도를 염찰(廉察)한 암행어사심택(沈澤)이 인조에게 아뢰기를, “태안군수신량은 관청에서 [[대동미(大同米)]]를 받아들이는 데에 옛날 결(結)로 계산하였고, 또 [[공납(貢納)]]할 표피(豹皮)의 값을 함부로 백성들에게 징수하였습니다.” 하였다. 인조가 신량을 잡아다가 심문하라고 명하니, 어사의 장계에 의하여 [[결장(決杖)]]하고 [[고신(告身)]]을 빼앗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2602017_001 『인조실록』 인조 26년 2월 17일 · 3월 19일]) 이리하여 신량은 태안군수에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 1648년(인조 26) 2월 홍청도(洪淸道)와 전라도 두 도를 염찰(廉察)한 암행어사심택(沈澤)이 인조에게 아뢰기를, “태안군수신량은 관청에서 [[대동미(大同米)]]를 받아들이는 데에 옛날 결(結)로 계산하였고, 또 [[공납(貢納)]]할 표피(豹皮)의 값을 함부로 백성들에게 징수하였습니다.” 하였다. 인조가 신량을 잡아다가 심문하라고 명하니, 어사의 장계에 의하여 [[결장(決杖)]]하고 [[고신(告身)]]을 빼앗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2602017_001 『인조실록』 인조 26년 2월 17일 · 3월 19일]) 이리하여 신량은 태안군수에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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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남과 교유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남의 선행(善行)을 들으면 나의 선행이나 다름없이 여기고, 남의 악행(惡行)을 보면 자기 몸을 더럽힐까봐 염려하였다. 시대를 걱정하고 풍속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고 사대부의 염치가 없어지니,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자녀들을 가르치고 훈계할 때, 작은 실수가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말하기를, “자녀가 허물이 있는데도 가르칠 줄을 모른다면, 짐승이 자기 새끼를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자녀들에게 훈계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 나는 너희들이 배우기에 힘쓰기를 원한다.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선비는 마땅히 마음을 곧고 진실하게 가지고, 행실을 구차스럽게 하지 않아야 한다. 정말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게 되어, 결국에는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둘째 아들 신익상(申翼相)이 과거에 합격하였을 때 그는 별로 기뻐하지 않고 앞으로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을 수련하라고 타일렀다. | 평소에 남과 교유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남의 선행(善行)을 들으면 나의 선행이나 다름없이 여기고, 남의 악행(惡行)을 보면 자기 몸을 더럽힐까봐 염려하였다. 시대를 걱정하고 풍속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고 사대부의 염치가 없어지니,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자녀들을 가르치고 훈계할 때, 작은 실수가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말하기를, “자녀가 허물이 있는데도 가르칠 줄을 모른다면, 짐승이 자기 새끼를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자녀들에게 훈계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 나는 너희들이 배우기에 힘쓰기를 원한다.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선비는 마땅히 마음을 곧고 진실하게 가지고, 행실을 구차스럽게 하지 않아야 한다. 정말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게 되어, 결국에는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둘째 아들 신익상(申翼相)이 과거에 합격하였을 때 그는 별로 기뻐하지 않고 앞으로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을 수련하라고 타일렀다. | ||
− | 성품이 깔끔하여 집에 있을 때에도 티끌 하나 남김없이 깨끗하게 방을 청소하였다. 왼쪽에는 그림을 걸고 오른쪽에는 책을 쌓아두고, 집안에는 소나무와 학을 길렀다. 꽃 피는 아침과 달 밝은 밤이면 고시(古詩)를 지어서 읊조리며 스스로 이를 즐겼다. 평소에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비록 도성(都城)의 시가지에서 거처하더라도 취향은 언제나 산림(山林)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항상 경관이 아름다운 천석(泉石)의 사이에서 소요(逍遙) 음영(吟詠)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었다. 그는 일찍이 풍악산(楓嶽山) 등 여러 명산(名山)을 두루 유람하였다. 신량은 젊어서부터 고시(古詩)와 [[율시(律詩)]]에 능하여 석주(石洲)[[권필(權韠)]]과 구원(九畹)이춘원( | + | 성품이 깔끔하여 집에 있을 때에도 티끌 하나 남김없이 깨끗하게 방을 청소하였다. 왼쪽에는 그림을 걸고 오른쪽에는 책을 쌓아두고, 집안에는 소나무와 학을 길렀다. 꽃 피는 아침과 달 밝은 밤이면 고시(古詩)를 지어서 읊조리며 스스로 이를 즐겼다. 평소에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비록 도성(都城)의 시가지에서 거처하더라도 취향은 언제나 산림(山林)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항상 경관이 아름다운 천석(泉石)의 사이에서 소요(逍遙) 음영(吟詠)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었다. 그는 일찍이 풍악산(楓嶽山) 등 여러 명산(名山)을 두루 유람하였다. 신량은 젊어서부터 고시(古詩)와 [[율시(律詩)]]에 능하여 석주(石洲)[[권필(權韠)]]과 구원(九畹)이춘원(李春元) 등이 그의 작품들을 보고 모두 감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평생 동안 친구들에게 이 작품들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고시에 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이를 보면, 그의 취향이 세속(世俗)을 떠나서 산림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는 도가(道家)에 가까운 청담파(淸談派) 유학자였다. |
=='''묘소와 후손'''== | =='''묘소와 후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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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판곡리(板谷里)에 있는데, 현석(玄石)[[박세채(朴世采)]]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남계집(南溪集)』 권72 「제용감정 증이조판서 신공 신도비명(濟用監正贈吏曹判書申公神道碑銘)」] 또 명재(明齋)윤증(尹拯)이 지은 [[행장(行狀)]]이 『명재유고(明齋遺稿)』에 실려 있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濟用監正申公行狀)」] 죽은 후에, 둘째 아들 신익상이 정승이 되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판곡리(板谷里)에 있는데, 현석(玄石)[[박세채(朴世采)]]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남계집(南溪集)』 권72 「제용감정 증이조판서 신공 신도비명(濟用監正贈吏曹判書申公神道碑銘)」] 또 명재(明齋)윤증(尹拯)이 지은 [[행장(行狀)]]이 『명재유고(明齋遺稿)』에 실려 있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濟用監正申公行狀)」] 죽은 후에, 둘째 아들 신익상이 정승이 되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 ||
− | 부인 성주 이씨( | + |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이경(李坰)의 딸인데, 자녀는 3남 5녀를 두었다. 큰 아들 신필상(申必相)은 [[주부(主簿)]]이고, 둘째 아들 신익상(申翼相)은 문과에 급제하여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셋째 아들 신우상(申遇相)은 [[참봉(參奉)]]이다. 큰 딸은 군수김광식(金光烒)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참판이규령(李奎齡)에게 시집갔고, 넷째 딸은 [[좌랑(佐郞)]]신종화(申宗華)에게 시집갔고, 다섯째 딸은 부사(府使)권세경(權世經)에게 시집갔다.[『남계집』 권72「신량 신도비명」]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8년 1월 9일 (화) 22:4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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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신량 |
한글표제 | 신량 |
한자표제 | 申湸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현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양지(湸之) |
호 | 호은(湖隱)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96년(선조 29) 1월 26일 |
사망 | 1663년(현종 4) 8월 29일 |
본관 | 고령(高靈) |
주거지 | 충청도 남포(南浦)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楊州) 판곡리(板谷里) |
증조부 | 신여주(申汝柱) |
조부 | 신발(申撥) |
부 | 신응구(申應榘) |
모_외조 | 해주 오씨(海州吳氏): 오희문(吳希文)의 딸 |
처_장인 | 성주 이씨(星州李氏): 이경(李坰)의 딸 →(자녀)3남 5녀 |
자녀 | (1자)신필상(申必相) (2자)신익상(申翼相) (3자)신우상(申遇相) (1녀)김광식(金光烒)의 처 (2녀)구봉익(具鳳翊)의 처 (3녀)이규령(李奎齡)의 처 (4녀)신종화(申宗華)의 처 (5녀)권세경(權世經)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신량(申湸)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인조 26년 2월 17일 · 3월 19일 |
총론
[1596년(선조 29)∼1663년(현종 4) = 68세.] 조선 후기 인조~현종 때의 문신. 예빈시(禮賓寺)정(正)을 지냈고 증직은 이조 판서이다. 자는 양지(湸之)이고, 호는 호은(湖隱)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남포(南浦)이다. 아버지는 좌부승지(左副承旨)신응거(申應渠)이고, 어머니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증 영의정(領議政)오희문(吳希文)의 딸이다. 영의정신숙주(申叔舟)의 둘째 아들 함길도 관찰사신면(申㴐)의 6대손이다. 풍옥헌(風玉軒)조수륜(趙守倫)의 제자이고,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그를 천거하였다. 추탄(楸灘)오윤겸(吳允謙) · 현헌(玄軒)신흠(申欽) · 동토(童土)윤순거(尹舜擧)와 절친한 사이였다.
인조 시대 활동
신량은 어린아이 때부터 신동(神童)이라고 소문이 나서 임금인 광해군이 그를 불러서 보고 감탄하여 『대학(大學)』 1부를 내려주었다. 15세 때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자 명성이 드러났으나, 그 후에 30세가 넘도록 대과(大科)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1623년(인조 1)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례를 끝마치고 나서, 1629년(인조 7) 34세 때에 음직(蔭職)으로 나가서, 사산 감역관(四山監役官)이 되었으나, 얼마 후에 사직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사산 감역관은 서울 부근의 남산(南山) 등 네 산에 소나무를 심고 사람들이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하는 일[禁松]을 맡아서 하였는데, 영조 때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대부가 선비들이 음직으로 처음에 사산 감역에 많이 임명되었다. 그 뒤에 우수운 판관(右水運判官)과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등 6품 이하의 참하관(參下官)을 두루 거쳤다.
1633년(인조 11) 공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는데[『승정원일기』인조 11년 6월 22일] 그의 재주를 아까워하던 이조 판서김상헌이 낭관(郎官)으로 천거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1634년(인조 12) 전라도구례현감(求禮縣監)으로 나갔는데[『명재유고(明齋遺稿)』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濟用監正申公行狀)」] 구례현감신량이 선정(善政)을 베풀어서 고을 사람들이 청원하여 현감을 연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청(淸)나라 군사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인조의 항복을 받고 주전파(主戰派)의 우두머리 김상헌을 잡아갔으나, 전라도 구례 지방은 무사하였다. 1638년(인조 16)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충청도 남포(藍浦) 옛 동네로 돌아왔다. 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 정의(正義)가 사라졌다고 한탄하였다. 이때부터 과거를 보기 위한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다시 벼슬길에 나가려는 뜻이 없어졌기 때문이다.[『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1639년(인조 17)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 익위(翊衛)에 임명되었다가, 1640년(인조 18) 금산군수(金山郡守)가 되었다.[『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군수신량이 선정을 베풀자, 구례현감 때처럼 금산 고을 사람들이 청원하여 군수를 연임하였다. 1644년(인조 22) 호조 정랑(正郞)이 되었는데, 청나라에 사로잡혀 갔던 김상헌이 돌아와서 그를 정랑으로 천거하였기 때문이다. 1645년(인조 23) 충청도태안군수(泰安郡守)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퇴계(退溪)이황(李滉)처럼 벼슬할 뜻이 없어서 언제나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마지못하여 부임하였다가 곧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혹시 그가 부득이하여 관직에 나아갔더라도,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즉각 사임하고 벼슬에 연연해하지 않았다.[『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1648년(인조 26) 2월 홍청도(洪淸道)와 전라도 두 도를 염찰(廉察)한 암행어사심택(沈澤)이 인조에게 아뢰기를, “태안군수신량은 관청에서 대동미(大同米)를 받아들이는 데에 옛날 결(結)로 계산하였고, 또 공납(貢納)할 표피(豹皮)의 값을 함부로 백성들에게 징수하였습니다.” 하였다. 인조가 신량을 잡아다가 심문하라고 명하니, 어사의 장계에 의하여 결장(決杖)하고 고신(告身)을 빼앗았다.(『인조실록』 인조 26년 2월 17일 · 3월 19일) 이리하여 신량은 태안군수에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효종 시대 활동
1645년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여, 청나라를 정벌할 <북벌(北伐) 정책>을 추진하였다. 호란(胡亂) 이후에 질자(質子)로 심양(瀋陽)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청나라의 정세를 잘 알고 있었던 효종은,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등을 등용하여, 이들이 <북벌 정책>을 맡아서 추진하도록 하였다. 그때 중국의 강남(江南) 지방과 대만(臺灣)에서 <3번(三藩)의 반란>이 일어나서 명나라 잔존 세력이 청나라와 싸우고 있었으므로, 청나라 군사가 강남 지방에 집중되는 틈을 타서, 조선에서 청나라 배후의 북방을 공격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송시열과 송준길이 서인의 신량을 천거하여, 영천군수(永川郡守)와 안산군수(安山郡守)에 임명되었는데, 신량은 전처럼 사양하지 않고 부임하자, 사람들은 신량이 은일(隱逸)이라는 칭송을 버리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하였다.[『남계집(南溪集)』 권72 「제용감정 증이조판서 신공 신도비명(濟用監正贈吏曹判書申公神道碑銘)」, 이하 「신량 신도비명」 약칭] 그러나 신량은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을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릴 때에는 정의의 신념에 따라서 결단하였기 때문에, 남의 비방과 칭찬 따위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1650년(효종 1) 영천군수가 되었다가, 1653년(효종 4) 안산군수로 옮겼으며,[『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1654년(효종 5)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었는데, 그는 부임하여 가는 곳마다 모두 지방의 성벽을 튼튼히 쌓고 군정(軍丁)과 무기(武器)를 점검하고 창고에 식량을 가득 채워서 정벌(征伐)에 대비하였다. 1655년(효종 6) 그가 청송 부사에서 물러나서 고향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이미 회갑[周甲]이었다.[『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그는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 은일이라고 칭송하는 말을 듣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였으나, <북벌 계획>이 실행되지 않자, 퇴계이황처럼 다시 벼슬을 피하기 시작하였다. 1657년(효종 8) 해주목사(海州牧使)에 임명되고, 이듬해 담양부사(潭陽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효종 8) 나이 61세 때에 신량이 그의 친구 윤순거에게 보낸 시(詩)에서, “이제부터 집 문을 닫고 도성의 남쪽 거리에 살며, 엊그제까지 육십 년 동안 잘못 산 것을 깨달았다네.[從今閉戶城南巷 六十年來悟昨非]” 하였는데, 당시 자기의 심경을 나타낸 것이다. 중국의 <3번의 반란>이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에 의하여 진압되면서 효종의 <북벌 계획>이 무산되었기 때문이었다. 1658년(효종 9) 군기시(軍器寺)정(正)에 임명되었고, 1659년(효종 10) 제용감(濟用監) 정에 임명되었다가 군자감(軍資監)으로 옮겨졌으나,[『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모두 부임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사직하였다.
현종 시대 활동
1659년 5월 효종이 왕위에 재임한 지 10년만에 41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그 아들 현종이 20세의 나이에 왕위에 즉위하였다. 효종이 청나라 심양의 질자관(質子館)에 있을 때 현종이 태어났다. 효종은 <북벌 계획>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돌아갔으므로, 현종도 송시열을 그대로 등용하여 그 꿈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중국 역사상 최대의 성군(聖君)인 성조(聖祖)강희제가 최대의 국력과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당시 중국을 정벌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송시열의 노론(老論)이 장기적으로 집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량은 윤순거와 가까웠으므로, 서인의 소론(少論)에 속하였다. 그러므로 송시열이 일찍이 그를 대간(臺諫)으로 천거하려고 하였을 때 신량은 기뻐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것은 나로 하여금 대중을 따라 세상을 속이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1661년(현종 2) 예빈시(禮賓寺) 정에 임명되었으나, 오래 재임하지 않고 사직하였다.[『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1662년(현종 3) 겨울에 다시 제용감 정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신량이 탄식하기를, “내가 올해 나이 70세가 다 되었는데, 아직도 다시 작은 녹봉에 연연해서 말년에 어찌 치욕을 당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병이라고 핑계하고 관직을 사양하였다.[『남계집』 권72「신량 신도비명」, 『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만년에 서울 집으로 돌아와서,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하고 앉아서, 세상의 시끄러운 일을 사절한 채 심신(心神)을 닦아서 성정(性情)을 길렀다. 항상 무슨 일을 계획하는 사람처럼 좌우에 도서(圖書)와 사서(史書)를 쌓아두고 책들을 읽으면서 스스로 즐기었다. 집 안에는 소나무와 꽃들을 심어 놓고 그 사이에 학 한 마리를 길렀다. 그 경관이 청정하여 초연(超然)한 사림(山林)의 취향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663년(현종 4) 8월 29일 노병으로 서울 집의 정침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8세였다.[『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성품과 일화
신량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그의 비명과 행장에 전한다.[『남계집』 권72「신량 신도비명」, 『명재유고』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 그는 성품이 청명(淸明)하고 단아(端雅)하며, 행동이 단정하였다. 그는 조용하게 자중하면서 내실의 덕을 갖추는 데 힘쓰며, 자기 재주를 남에게 과시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됨이 온아하고 기품이 있으나 성격이 엄정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고, 시비(是非)를 가릴 때 일체 정의에 따라 결단하였다. 남과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처신할 때에는 명예를 구하려고 행동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명예를 구하는 정사를 하지 않았으며, 이해와 득실이나 비방과 칭찬 따위에 그 마음을 얽매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정직하고 순수하였으며, 아버지 신응거로부터 가정교육도 잘 받았다. 8세에 풍옥헌조수륜에게 수업을 받았는데, 그는 다른 아이들과 농지거리를 전혀 하지 않아서 조수륜이 특별히 사랑하였다. 광해군이 그가 신동이란 소문을 듣고 불러 본 다음에 감탄하고 책을 상으로 주었다. 그는 조금 자라자, 문사(文詞)를 공부하였는데,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다. 창랑(滄浪)성문준(成文濬)이 그를 아끼고 사랑하여 그에게 책을 제대로 읽는 7가지 비결 곧 「독서 7결(讀書七訣)」을 지어서 주고 독서(讀書)를 지도하였다. 신량의 아버지 신응거는 성문준의 아버지 우계(牛溪)성혼(成渾)의 제자였고, 신량을 아낀 성문준은 성혼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신응거와 신량 부자는 서인(西人)에 속하였다.
평소에 남과 교유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남의 선행(善行)을 들으면 나의 선행이나 다름없이 여기고, 남의 악행(惡行)을 보면 자기 몸을 더럽힐까봐 염려하였다. 시대를 걱정하고 풍속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고 사대부의 염치가 없어지니,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자녀들을 가르치고 훈계할 때, 작은 실수가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말하기를, “자녀가 허물이 있는데도 가르칠 줄을 모른다면, 짐승이 자기 새끼를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자녀들에게 훈계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 나는 너희들이 배우기에 힘쓰기를 원한다.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선비는 마땅히 마음을 곧고 진실하게 가지고, 행실을 구차스럽게 하지 않아야 한다. 정말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게 되어, 결국에는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둘째 아들 신익상(申翼相)이 과거에 합격하였을 때 그는 별로 기뻐하지 않고 앞으로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을 수련하라고 타일렀다.
성품이 깔끔하여 집에 있을 때에도 티끌 하나 남김없이 깨끗하게 방을 청소하였다. 왼쪽에는 그림을 걸고 오른쪽에는 책을 쌓아두고, 집안에는 소나무와 학을 길렀다. 꽃 피는 아침과 달 밝은 밤이면 고시(古詩)를 지어서 읊조리며 스스로 이를 즐겼다. 평소에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비록 도성(都城)의 시가지에서 거처하더라도 취향은 언제나 산림(山林)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항상 경관이 아름다운 천석(泉石)의 사이에서 소요(逍遙) 음영(吟詠)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었다. 그는 일찍이 풍악산(楓嶽山) 등 여러 명산(名山)을 두루 유람하였다. 신량은 젊어서부터 고시(古詩)와 율시(律詩)에 능하여 석주(石洲)권필(權韠)과 구원(九畹)이춘원(李春元) 등이 그의 작품들을 보고 모두 감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평생 동안 친구들에게 이 작품들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고시에 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이를 보면, 그의 취향이 세속(世俗)을 떠나서 산림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는 도가(道家)에 가까운 청담파(淸談派) 유학자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판곡리(板谷里)에 있는데, 현석(玄石)박세채(朴世采)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남계집(南溪集)』 권72 「제용감정 증이조판서 신공 신도비명(濟用監正贈吏曹判書申公神道碑銘)」] 또 명재(明齋)윤증(尹拯)이 지은 행장(行狀)이 『명재유고(明齋遺稿)』에 실려 있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44 「제용감정 신공 행장(濟用監正申公行狀)」] 죽은 후에, 둘째 아들 신익상이 정승이 되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이경(李坰)의 딸인데, 자녀는 3남 5녀를 두었다. 큰 아들 신필상(申必相)은 주부(主簿)이고, 둘째 아들 신익상(申翼相)은 문과에 급제하여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셋째 아들 신우상(申遇相)은 참봉(參奉)이다. 큰 딸은 군수김광식(金光烒)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참판이규령(李奎齡)에게 시집갔고, 넷째 딸은 좌랑(佐郞)신종화(申宗華)에게 시집갔고, 다섯째 딸은 부사(府使)권세경(權世經)에게 시집갔다.[『남계집』 권72「신량 신도비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농암집(農巖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사계전서(沙溪全書)』
- 『속잡록(續雜錄)』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청음집(淸陰集)』
- 『창랑집(滄浪集)』
- 『노서유고(魯西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