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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의 일부가 『회재유집(懷齋遺集)』에 전한다. | 저술의 일부가 『회재유집(懷齋遺集)』에 전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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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옥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극히 착한 성품이 가지고 있었고 덕기(德器)가 매우 커서 화평하면서도 엄격하여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였다. 남의 착한 것을 보면 칭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의리에 어그러지면 남에게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았다. 만년에 『역경(易經)』·『예경(禮經)』에 마음을 기울였고, 또한 남에게 널리 배워서 깊이 통달하였다. | 박광옥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극히 착한 성품이 가지고 있었고 덕기(德器)가 매우 커서 화평하면서도 엄격하여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였다. 남의 착한 것을 보면 칭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의리에 어그러지면 남에게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았다. 만년에 『역경(易經)』·『예경(禮經)』에 마음을 기울였고, 또한 남에게 널리 배워서 깊이 통달하였다. | ||
− | 고봉(高峯)기대승(奇大升)·옥계(玉溪)노진( | + | 고봉(高峯)기대승(奇大升)·옥계(玉溪)노진(盧禛)·사암(思菴)박순(朴淳) 등과 교유하였다. |
=='''묘소와 제향'''== | =='''묘소와 제향'''== |
2018년 1월 9일 (화) 22:4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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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광옥 |
한글표제 | 박광옥 |
한자표제 | 朴光玉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경원(景瑗) |
호 | 회재(懷齋) |
출생 | 1526년(중종21) 1월 26일 |
사망 | 1593년(선조26) 10월 14일 |
본관 | 음성(陰城) |
주거지 | 전라도 광주(光州) |
묘소소재지 | 전라도 광주(光州) 운동(雲洞) |
증조부 | 박형지(朴亨之) |
조부 | 박자회(朴子回) |
부 | 박곤(朴鯤) |
모_외조 | 해평윤씨(海平尹氏): 윤인손(尹仁孫)의 딸 |
처_장인 | 서씨(徐氏): 서욱(徐勖)의 딸→(자녀)4녀 |
자녀 | (1녀)유사경(柳思敬)의 처 (2녀)노사첨(盧士詹)의 처 (3녀)김융지(金隆址)의 처 (4녀)임협(林悏)의 처 |
저술문집 | 『회재유집(懷齋遺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광옥(朴光玉) |
총론
[1526년(중종21)~1593년(선조26) = 68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이다. 본관은 음성(陰城)이고, 전라도 광주(光州) 출신이다. 아버지는 사예(司藝)박곤(朴鯤)이고, 어머니 해평윤씨(海平尹氏)는 경안도찰방(慶安道察訪)윤인손(尹仁孫)의 딸이다.
명조~선조 시대 활동
21세 때인 1546년(명종1)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560년(명종15)에 목사(牧使)유경심(柳景深)을 도와 향교(鄕校)를 중수하였는데, 그가 학규(學規)를 만들고 재물을 내어 학전(學田)을 늘렸으며, 가숙(家塾)을 세워 생도를 가르쳤다.
1568년(선조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내시(內侍) 교관(敎官)에 제수되었고, 그 뒤 종부시(宗簿寺)주부(主簿)가 되었다. 1574년(선조7)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운봉현감(雲峯縣監)이 되었을 때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를 세웠다. 1578년(선조11)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가 되었다. 1579년(선조12) 예조정랑이 되어, 춘추관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다. 1580년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으며, 그 뒤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이 되었다. 이해 여름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다시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여러 번 옮겨서 상례(相禮)가 되고 편수관(編修官)을 겸하였다. 1583년(선조16) 영광군수(靈光郡守)를, 3년 뒤에는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지냈는데, 영광과 밀양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뒤에 광주와 전주(全州)의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1589년(선조22) 성균관사예(司藝), 사섬시(司贍寺)정(正)을 거쳐 봉상시(奉常寺) 정이 되었는데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임진왜란 때 활동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광주에 있었는데, 전라도 관군이 공주(公州)에서 왜적에게 패배하여 전라도 인심이 크게 동요되었다. 그는 김천일(金千鎰)·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약속한 날짜에 고경명이 담양(潭陽)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그는 병 때문에 가지 못하고 여러 자제들을 불러 모아 군량과 기계를 준비하여 고경명의 의병과 합류하게 하였다. 이때 권율(權慄)이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어, 날마다 군현(郡縣)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불러 모았으나, 흩어진 군사들 중에 호응하는 자가 적었다. 박광옥이 부로(父老)들을 근방 고을에 나누어 보내어 사람들을 깨우쳐서 수천 명을 모집하여 보내니, 권율이 크게 기뻐하여 매사에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권율의 추천으로 승문원(承文院)판교(判校)에 임명되었다가,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바꾸어 임명되었는데, 그는, “병이 심하기는 하나 의리상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 하고, 나주에 이르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다시 왜적과 싸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병이 위독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1593년 10월 14일 별세하니, 향년 68세였다.
저술의 일부가 『회재유집(懷齋遺集)』에 전한다.
성품과 일화
박광옥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극히 착한 성품이 가지고 있었고 덕기(德器)가 매우 커서 화평하면서도 엄격하여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였다. 남의 착한 것을 보면 칭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의리에 어그러지면 남에게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았다. 만년에 『역경(易經)』·『예경(禮經)』에 마음을 기울였고, 또한 남에게 널리 배워서 깊이 통달하였다.
고봉(高峯)기대승(奇大升)·옥계(玉溪)노진(盧禛)·사암(思菴)박순(朴淳) 등과 교유하였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전라도 광주 운동(雲洞)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허목(許穆)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 전라도 광산군(光山郡) 서창면(西倉面) 매월리(梅月里)에 있는 의열사(義烈祠)와 남원군(南原郡) 운봉면(雲峰面)에 있는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회재유집(懷齋遺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고봉집(高峯集)』
- 『난중잡록(亂中雜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석담일기(石潭日記)』
- 『약천집(藥川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사계전서(沙溪全書)』
- 『청음집(淸陰集)』
- 『계곡집(谿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