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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문종 시대 최덕지는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고, 외관으로 함양군수(咸陽郡守)·김제군수( | + | 세종문종 시대 최덕지는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고, 외관으로 함양군수(咸陽郡守)·김제군수(金堤郡守)·남원부사(南原府使) 등 여러 주(州)·군(郡)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를 보면, 1425년(세종 7) 12월 함양군 지사(咸陽郡知事)최덕지 등이 사조(辭朝)하니, 세종이 인견하고 지방의 행정을 잘하라고 격려하였으며, 1436년(세종 18) 11월 김제군 지사(金堤郡知事)최덕지가 진주(眞珠) 1매(枚)를 세종에게 바치니, 세종이 [[내구마(內廐馬)]] 1필을 내려 주었다.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 직제학에 임명되었고, 외직으로 남원부사를 역임하였다. 남원부사로 있다가 낙향(落鄕)하였는데, 전주에서 영암으로 이사하여 경치 좋은 영보촌에 누각을 짓고 서재(書齋)로 사용하면서 ‘존양당(存養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연촌 유사(烟村遺事)」 참고.) |
− | 농암(農巖)김창협( | + | 농암(農巖)김창협(金昌協)은 “최덕지가 귀향하여 마침내 맹자(孟子)가 말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한다.[存心養性]’는 말을 택하여,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지었는데, 그가 바른 학문에 마음을 두고서 덕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일을 잊지 않겠다는 뜻을 알 수 있다.” 하였다.(『농암집(農巖集)』 권7 참고.) 원래 최덕지는 호가 연촌(烟村), 또는 연촌우수(烟村迂叟)라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스스로 자기 호를 존양(存養), 또는 존양당(存養堂)이라고 일컬었다.(『해동잡록(海東雜錄)』 권4 참고.) |
1451년(문종 1) 문종이 최덕지를 불러서 예문관 직제학에 임명하였다.(「연촌 유사」 참고.) 그해 10월 예문관 직제학최덕지가 늙었다고 고(告)하고, [[전리(田里)]]에 돌아가기를 원하니, 문종이 도승지이계전(李季甸)에게 말하기를, “지난번 윤대(輪對)에서 최덕지와 말을 해보니, 사람됨이 순박하고 진실하며 아직 그다지 늙지도 않았었다. 붙잡아서 조정에 머물러 두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이계전이 대답하기를, “그는 돌아갈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무리 붙잡더라도 머물러 둘 수 없습니다.” 하므로, 문종이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그때 최덕지는 나이가 68세였다. 세상 사람들은 나이를 무릅쓰고 억지로 조정에 벼슬하려는 자가 많았는데, 최덕지는 아직 [[치사(致仕)]]할 나이에 이르지도 아니하여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가니, 당시의 의논이 그를 칭찬하였다.(『문종실록(文宗實錄)』 참고.)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롭게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학덕을 칭송하며, 다투어 송별연을 열고 전송하는 시(詩)·부(賦)를 지어주고 노자(路資)를 마련하여 주었다. | 1451년(문종 1) 문종이 최덕지를 불러서 예문관 직제학에 임명하였다.(「연촌 유사」 참고.) 그해 10월 예문관 직제학최덕지가 늙었다고 고(告)하고, [[전리(田里)]]에 돌아가기를 원하니, 문종이 도승지이계전(李季甸)에게 말하기를, “지난번 윤대(輪對)에서 최덕지와 말을 해보니, 사람됨이 순박하고 진실하며 아직 그다지 늙지도 않았었다. 붙잡아서 조정에 머물러 두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이계전이 대답하기를, “그는 돌아갈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무리 붙잡더라도 머물러 둘 수 없습니다.” 하므로, 문종이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그때 최덕지는 나이가 68세였다. 세상 사람들은 나이를 무릅쓰고 억지로 조정에 벼슬하려는 자가 많았는데, 최덕지는 아직 [[치사(致仕)]]할 나이에 이르지도 아니하여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가니, 당시의 의논이 그를 칭찬하였다.(『문종실록(文宗實錄)』 참고.)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롭게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학덕을 칭송하며, 다투어 송별연을 열고 전송하는 시(詩)·부(賦)를 지어주고 노자(路資)를 마련하여 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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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이 승하하기 전부터 이미 조정의 분위기는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지지하는 두 파로 나누어져 대립하였다. 그는 어느 편에도 붙좇기가 싫어서, 1451년(문종 1) 겨울에 나이가 너무 많다고 핑계를 대면서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그때 조정에서 같이 벼슬하던 명사(名士) [[최항(崔恒)]]·성삼문(成三問) 등이 그 뜻을 고상하게 여겨서, 송별연을 열고 시를 지어서 작별을 아쉬워하였다. 그때 성삼문이 지은 「직제학 최덕지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崔提學德之 還鄕]」라는 오언율시를 보면, 첫 구절에서 “전원에 돌아가는 것은 은둔할 계책이 아니고[歸田非隱計], 벼슬의 출처를 바로 이와 같이 하기 위함이로다[出處正如斯].”라고 하여, 최덕지가 귀향하는 까닭은 은둔하여 세상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벼슬하는 자가 나이 70세쯤 되면, 벼슬에 나오고 들어가는 출처(出處)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읊었다. 마지막 구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의리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었으니[終始能全義], 공과 같은 사람이야 말로 바로 저의 스승입니다[如公我所師].” 하였다. 당시 34세의 성삼문은 시종 벼슬살이 하면서 의리를 지킨 유학자 68세의 최덕지를 자기 스승이라고 하면서, 그의 의리를 높이 평가하였다.(『해동잡록』 권4 참고.) | 문종이 승하하기 전부터 이미 조정의 분위기는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지지하는 두 파로 나누어져 대립하였다. 그는 어느 편에도 붙좇기가 싫어서, 1451년(문종 1) 겨울에 나이가 너무 많다고 핑계를 대면서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그때 조정에서 같이 벼슬하던 명사(名士) [[최항(崔恒)]]·성삼문(成三問) 등이 그 뜻을 고상하게 여겨서, 송별연을 열고 시를 지어서 작별을 아쉬워하였다. 그때 성삼문이 지은 「직제학 최덕지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崔提學德之 還鄕]」라는 오언율시를 보면, 첫 구절에서 “전원에 돌아가는 것은 은둔할 계책이 아니고[歸田非隱計], 벼슬의 출처를 바로 이와 같이 하기 위함이로다[出處正如斯].”라고 하여, 최덕지가 귀향하는 까닭은 은둔하여 세상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벼슬하는 자가 나이 70세쯤 되면, 벼슬에 나오고 들어가는 출처(出處)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읊었다. 마지막 구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의리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었으니[終始能全義], 공과 같은 사람이야 말로 바로 저의 스승입니다[如公我所師].” 하였다. 당시 34세의 성삼문은 시종 벼슬살이 하면서 의리를 지킨 유학자 68세의 최덕지를 자기 스승이라고 하면서, 그의 의리를 높이 평가하였다.(『해동잡록』 권4 참고.) | ||
− | 원래 나라의 제도는 『예기(禮記)』에 따라 나이 70세가 되면 관리들이 걸골(乞骨)하고 [[치사(致仕)]]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는 2년을 앞당겨서 68세에 은퇴하였다. 그런데, 그가 70세가 되던 해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 일파가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켜서 영의정황보인(皇甫仁), 좌의정김종서( | + | 원래 나라의 제도는 『예기(禮記)』에 따라 나이 70세가 되면 관리들이 걸골(乞骨)하고 [[치사(致仕)]]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는 2년을 앞당겨서 68세에 은퇴하였다. 그런데, 그가 70세가 되던 해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 일파가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켜서 영의정황보인(皇甫仁), 좌의정김종서(金宗瑞)를 비롯하여 반대파 조극관(趙克寬)·민신(閔伸) 등 수많은 관료들을 도륙(屠戮)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일찌감치 정계에서 물러난 것은, 사전에 기미를 살펴 자기 몸을 보존하려고 전라도 영광으로 은거(隱居)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최덕지가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최남단의 땅으로 은둔한 것을 보고, 그의 명철한 지혜에 감탄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4을 보면, “얼마 뒤에 <계유정난>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므로, 최덕지가 물러간 시기가 참으로 미리 기미를 알고 몸을 보전하려고 한 것과 같았다. 이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이 일컫기를, ‘그의 밝은 지혜와 올바른 학문과 높은 의리는 견줄 데가 없다.’ 하였다. 이리하여 후대 조정에서는 그를 선현(先賢)으로 추앙하고, 그의 자손을 등용하였다.”라고 하였다. |
− | 한편, 1680년(숙종 6) 농암(農巖)김창협( | + | 한편, 1680년(숙종 6) 농암(農巖)김창협(金昌協)이 연촌서원(煙村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소차(疏箚)에서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정치와 교화는 세종·문종 때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경학(經學)과 문장(文章)에 밝은 선비들이 뛰어난 식견으로 줄지어 조정에 모여들어 모두 공명(功名)을 떨쳤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읍니다. 최덕지는 그 훌륭한 재주로써 그들과 어울릴 때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만일 최덕지가 느긋하게 그들을 따라가면서 시운(時運)에 편승하였더라면 경상(卿相)의 자리에 올랐을 터인데, 벼슬을 버리고 멀리 떠나서 변방 산천에 은둔한 채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는 영욕(榮辱)을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미리 기미를 살피고 화를 피하는 자들과 비교하여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여(『농암집(農巖集)』 권7 참고) 최덕지의 고결한 의리와 순수한 양식(良識)을 높이 평가하였다. |
=='''묘소와 후손'''== | =='''묘소와 후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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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최덕지를 추모하여 존양사(存養祠)를 세웠고, 나중에 최충성, 김수항(金壽恒), 김창협(金昌協)을 추가 배향하였다. 1713년(숙종 39) 나라에서 이곳을 녹동서원이라 사액(賜額)하여 사액서원이 되었다. | 이들은 최덕지를 추모하여 존양사(存養祠)를 세웠고, 나중에 최충성, 김수항(金壽恒), 김창협(金昌協)을 추가 배향하였다. 1713년(숙종 39) 나라에서 이곳을 녹동서원이라 사액(賜額)하여 사액서원이 되었다. | ||
− | 부인 조씨(趙氏)는 조안정(趙安鼎)의 딸인데, 아들은 최조(崔凋)와 최별(崔撇) 등이다. 손자는 최대(崔岱)와 최충성(崔忠成) 등이 있고, 증손자는 최련손(崔連孫) 등이 있다. 손자 최충성은 김굉필( | + | 부인 조씨(趙氏)는 조안정(趙安鼎)의 딸인데, 아들은 최조(崔凋)와 최별(崔撇) 등이다. 손자는 최대(崔岱)와 최충성(崔忠成) 등이 있고, 증손자는 최련손(崔連孫) 등이 있다. 손자 최충성은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서 『산당집(山堂集)』을 남겼으며, 증손자 최련손(崔連孫)은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지냈다.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8년 1월 9일 (화) 22:5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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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최덕지 |
한글표제 | 최덕지 |
한자표제 | 崔德之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태종~문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가구(可久), 우수(迂叟)『신증동국여지승람』 권35권 |
호 | 연촌(烟村), 존양(存養), 존양당(存養堂) |
시호 | 문숙(文肅)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384년(우왕 10) |
사망 | 1455년(세조 1)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전라도 전주, 전라도 영암(靈岩) 영보촌(永保村) |
증조부 | 최룡봉(崔龍鳳) |
조부 | 최을인(崔乙仁) |
부 | 최담(崔霮) |
모_외조 | 전주박씨(全州朴氏): 박인부(朴仁夫)의 딸 |
형제 | (형)최광지(崔匡之), 최직지(崔直之), 최득지(崔得之) |
처_장인 | 조씨(趙氏); 조안정(趙安鼎)의 딸 |
자녀 | (1자)최조(崔凋) (2자)최별(崔撇) |
저술문집 | 『유초(流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최덕지(崔德之) |
총론
[1384년(우왕 10)∼1455년(세조 1) = 72세]. 조선 초기 태종~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예문관(藝文館)직제학(直提學)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전라도 전주 출신인데, 만년에 전라도 영암(靈岩) 영보촌(永保村)에 살았다.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이다. 아버지는 참의(參議)최담(崔霮)이고, 어머니 전주박씨(全州朴氏)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 김굉필(金宏弼)의 제자 최충성(崔忠成)의 조부이고, 도승지최련손(崔連孫)의 증조부다.
태종 시대 활동
1405년(태종 5) 22세에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관례대로 참하관(參下官)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추천을 받아서 사국(史局)에 들어가서 사관(史官)이 되었다. 1409년(태종 9) 교서관(校書館)정자(正字)에 임명되었고, 1410년(태종 10) 6월 원단(圜壇)에서 기우제를 지내는데 천제(天帝)의 제문만을 준비하고, 사방 오제(五帝)의 제문을 준비하지 아니하여, 하옥되었다가 3일 만에 석방되었다. 『태종실록(太宗實錄)』 에 의하면, 이때 의정부 지사(知事)황희(黃喜)를 보내어 원단에서 하늘에 비를 빌게 하였는데, 황희가 원단에 가서 향(香)과 축(祝)을 점고(點考)하여 보니, 호천상제(昊天上帝: 하느님)의 제문(祭文)만 있고 오제(五帝)의 제문(祭文)은 없었다. 태종이 노하여 꾸짖기를, “어찌하여 불경(不敬)하기가 이와 같은 데 이르렀는가? 이와 같이 직사(職事)를 공경하고 조심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하늘의 응험(應驗)하여 비를 내리겠는가?” 하였다. 이어 교서관의 역삭 정자(役朔正字)최덕지를 하옥(下獄)하였다가, 조금 뒤에 태종이 말하기를, “제사지내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지금 그를 놓아주라.” 하여, 감옥에서 풀려났다. 당시 원단의 기우제는 며칠 간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태종 후기에 옥당(玉堂)과 대각(臺閣)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고, 여러 번 고을의 수령으로 나갔는데, 모두 치적이 뛰어났다. 1417년(태종 17) 12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있을 때 감찰김소남(金召南) 등이 같은 동료 감찰김윤(金潤)·정곡(鄭谷)의 범한 죄을 가지고 본부(本府)에 고발하였는데, 태종이 김윤 등의 범한 죄가 다른 사람의 죄보다 경하다고 하여 특별히 직사에 나오도록 명하였다. 최덕지·김소남 등이 김윤과 정곡이 피혐(避嫌)하지 않고 직사에 그대로 나오는 것은 대간(臺諫)의 직임에 어그러진다고 강력히 항의하니, 태종이 최덕지 등을 불러서 그 까닭을 묻고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4일 만에 석방하고, 사헌부에서 모두 파직하였다.
세종~문종 시대 활동
세종문종 시대 최덕지는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고, 외관으로 함양군수(咸陽郡守)·김제군수(金堤郡守)·남원부사(南原府使) 등 여러 주(州)·군(郡)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를 보면, 1425년(세종 7) 12월 함양군 지사(咸陽郡知事)최덕지 등이 사조(辭朝)하니, 세종이 인견하고 지방의 행정을 잘하라고 격려하였으며, 1436년(세종 18) 11월 김제군 지사(金堤郡知事)최덕지가 진주(眞珠) 1매(枚)를 세종에게 바치니, 세종이 내구마(內廐馬) 1필을 내려 주었다.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 직제학에 임명되었고, 외직으로 남원부사를 역임하였다. 남원부사로 있다가 낙향(落鄕)하였는데, 전주에서 영암으로 이사하여 경치 좋은 영보촌에 누각을 짓고 서재(書齋)로 사용하면서 ‘존양당(存養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연촌 유사(烟村遺事)」 참고.)
농암(農巖)김창협(金昌協)은 “최덕지가 귀향하여 마침내 맹자(孟子)가 말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한다.[存心養性]’는 말을 택하여,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지었는데, 그가 바른 학문에 마음을 두고서 덕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일을 잊지 않겠다는 뜻을 알 수 있다.” 하였다.(『농암집(農巖集)』 권7 참고.) 원래 최덕지는 호가 연촌(烟村), 또는 연촌우수(烟村迂叟)라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스스로 자기 호를 존양(存養), 또는 존양당(存養堂)이라고 일컬었다.(『해동잡록(海東雜錄)』 권4 참고.)
1451년(문종 1) 문종이 최덕지를 불러서 예문관 직제학에 임명하였다.(「연촌 유사」 참고.) 그해 10월 예문관 직제학최덕지가 늙었다고 고(告)하고, 전리(田里)에 돌아가기를 원하니, 문종이 도승지이계전(李季甸)에게 말하기를, “지난번 윤대(輪對)에서 최덕지와 말을 해보니, 사람됨이 순박하고 진실하며 아직 그다지 늙지도 않았었다. 붙잡아서 조정에 머물러 두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이계전이 대답하기를, “그는 돌아갈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무리 붙잡더라도 머물러 둘 수 없습니다.” 하므로, 문종이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그때 최덕지는 나이가 68세였다. 세상 사람들은 나이를 무릅쓰고 억지로 조정에 벼슬하려는 자가 많았는데, 최덕지는 아직 치사(致仕)할 나이에 이르지도 아니하여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가니, 당시의 의논이 그를 칭찬하였다.(『문종실록(文宗實錄)』 참고.)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롭게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학덕을 칭송하며, 다투어 송별연을 열고 전송하는 시(詩)·부(賦)를 지어주고 노자(路資)를 마련하여 주었다.
1451년(문종 2) 최덕지는 전라도 영암 영보촌으로 물러가서 존양당에서 기거하였다. 자연을 관조(觀照)하고 시·부를 음영(吟詠)하면서 평안하게 5년 동안 살다가, 1455년(세조 1) 존양루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2세였다. 최덕지가 살아 있을 때 그린 초상화인 영정(影幀)이 그가 거처하던 존양루(存養樓)에 봉안되었다.(「연촌 유사(烟村遺事)」 참고.) 최덕지초상(崔德之肖像) 및 유지초본(油紙草本)은 1975년 5월 16일 보물제594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전주최씨 문중(소재지: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418)에 보관되어 있다. 그는 시(詩)를 잘 짓는다고 이름났으나, 그의 유작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성품과 평가
최덕지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청렴하고 간결하며, 행실은 검소하고 절약하였다. 일을 처리하는 데는 자상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정치를 잘 했다는 평을 받았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3·권39 참고.)
문종이 승하하기 전부터 이미 조정의 분위기는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지지하는 두 파로 나누어져 대립하였다. 그는 어느 편에도 붙좇기가 싫어서, 1451년(문종 1) 겨울에 나이가 너무 많다고 핑계를 대면서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그때 조정에서 같이 벼슬하던 명사(名士) 최항(崔恒)·성삼문(成三問) 등이 그 뜻을 고상하게 여겨서, 송별연을 열고 시를 지어서 작별을 아쉬워하였다. 그때 성삼문이 지은 「직제학 최덕지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崔提學德之 還鄕]」라는 오언율시를 보면, 첫 구절에서 “전원에 돌아가는 것은 은둔할 계책이 아니고[歸田非隱計], 벼슬의 출처를 바로 이와 같이 하기 위함이로다[出處正如斯].”라고 하여, 최덕지가 귀향하는 까닭은 은둔하여 세상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벼슬하는 자가 나이 70세쯤 되면, 벼슬에 나오고 들어가는 출처(出處)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읊었다. 마지막 구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의리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었으니[終始能全義], 공과 같은 사람이야 말로 바로 저의 스승입니다[如公我所師].” 하였다. 당시 34세의 성삼문은 시종 벼슬살이 하면서 의리를 지킨 유학자 68세의 최덕지를 자기 스승이라고 하면서, 그의 의리를 높이 평가하였다.(『해동잡록』 권4 참고.)
원래 나라의 제도는 『예기(禮記)』에 따라 나이 70세가 되면 관리들이 걸골(乞骨)하고 치사(致仕)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는 2년을 앞당겨서 68세에 은퇴하였다. 그런데, 그가 70세가 되던 해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 일파가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켜서 영의정황보인(皇甫仁), 좌의정김종서(金宗瑞)를 비롯하여 반대파 조극관(趙克寬)·민신(閔伸) 등 수많은 관료들을 도륙(屠戮)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일찌감치 정계에서 물러난 것은, 사전에 기미를 살펴 자기 몸을 보존하려고 전라도 영광으로 은거(隱居)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최덕지가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최남단의 땅으로 은둔한 것을 보고, 그의 명철한 지혜에 감탄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4을 보면, “얼마 뒤에 <계유정난>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므로, 최덕지가 물러간 시기가 참으로 미리 기미를 알고 몸을 보전하려고 한 것과 같았다. 이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이 일컫기를, ‘그의 밝은 지혜와 올바른 학문과 높은 의리는 견줄 데가 없다.’ 하였다. 이리하여 후대 조정에서는 그를 선현(先賢)으로 추앙하고, 그의 자손을 등용하였다.”라고 하였다.
한편, 1680년(숙종 6) 농암(農巖)김창협(金昌協)이 연촌서원(煙村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소차(疏箚)에서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정치와 교화는 세종·문종 때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경학(經學)과 문장(文章)에 밝은 선비들이 뛰어난 식견으로 줄지어 조정에 모여들어 모두 공명(功名)을 떨쳤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읍니다. 최덕지는 그 훌륭한 재주로써 그들과 어울릴 때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만일 최덕지가 느긋하게 그들을 따라가면서 시운(時運)에 편승하였더라면 경상(卿相)의 자리에 올랐을 터인데, 벼슬을 버리고 멀리 떠나서 변방 산천에 은둔한 채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는 영욕(榮辱)을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미리 기미를 살피고 화를 피하는 자들과 비교하여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여(『농암집(農巖集)』 권7 참고) 최덕지의 고결한 의리와 순수한 양식(良識)을 높이 평가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묘소는 전라도 영암 덕진(德津)에 있는데, 비갈(碑碣)은 없고, 「연촌 유사(烟村遺事)」가 남아 있다. 전주의 서산사우(西山祠宇),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1630년(인조8) 전라도 영암의 유생(儒生)들이 최덕지가 영암에 내려와서 거처하던 존양루에다 서원을 짓고 ‘존양당’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이들은 최덕지를 추모하여 존양사(存養祠)를 세웠고, 나중에 최충성, 김수항(金壽恒), 김창협(金昌協)을 추가 배향하였다. 1713년(숙종 39) 나라에서 이곳을 녹동서원이라 사액(賜額)하여 사액서원이 되었다.
부인 조씨(趙氏)는 조안정(趙安鼎)의 딸인데, 아들은 최조(崔凋)와 최별(崔撇) 등이다. 손자는 최대(崔岱)와 최충성(崔忠成) 등이 있고, 증손자는 최련손(崔連孫) 등이 있다. 손자 최충성은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서 『산당집(山堂集)』을 남겼으며, 증손자 최련손(崔連孫)은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지냈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해동잡록(海東雜錄)』
- 『산당집(山堂集)』
- 『태허정집(太虛亭集)』
- 『경재집(敬齋集)』
- 『관란유고(觀瀾遺稿)』
- 『노촌집(老村集)』
- 『농암집(農巖集)』
- 『문곡집(文谷集)』
- 『번암집(樊巖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한포재집(寒圃齋集)』
-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