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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대한제국시기까지 왕이나 왕세자, 왕세손의 [[원유관복(遠遊冠服)]]을 대표하는 붉은색 상의. | 고려시대부터 대한제국시기까지 왕이나 왕세자, 왕세손의 [[원유관복(遠遊冠服)]]을 대표하는 붉은색 상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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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관복의 구성물인 강색(絳色), 즉 붉은색 상의로서, 삭망(朔望)·[[조강(朝講)]]·진표(進表)·조근(朝覲) 등의 조하(朝賀)를 받을 때 착용하였다. 고려 공민왕대에는 명나라에서 원유관복을 하사하였으며, 조선시대의 경우 세종대에 명에서 새로 하사받아 착용하였다. | 원유관복의 구성물인 강색(絳色), 즉 붉은색 상의로서, 삭망(朔望)·[[조강(朝講)]]·진표(進表)·조근(朝覲) 등의 조하(朝賀)를 받을 때 착용하였다. 고려 공민왕대에는 명나라에서 원유관복을 하사하였으며, 조선시대의 경우 세종대에 명에서 새로 하사받아 착용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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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나 왕세자가 입는 원유관복은 강사포에 해당되는 의(衣)를 비롯하여 손에 드는 [[규(圭)]], 머리에 쓰는 [[관(冠)]], 전후 치마폭이 나뉜 남자의 의례용 치마인 상(裳), 강사포 위에 두르는 [[대대(大帶)]], 원유관복을 입을 때 일상복 위에 가장 먼저 입는 중단(中單), 혁대의 좌우에 한 쌍씩 걸어 내려뜨리는 패(佩) 즉 패옥과 강사포 위로 뒤쪽 허리 아래에 내려뜨리는 [[수(綬)]], 곧 후수(後綬)와 수와 함께 앞쪽으로 허리 아래를 덮어 내려뜨리는 앞치마형의 [[폐슬(蔽膝)]], 붉은색의 버선인 [[말(襪)]]과 붉은색의 신인 석(舃)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왕이나 왕세자가 입는 원유관복은 강사포에 해당되는 의(衣)를 비롯하여 손에 드는 [[규(圭)]], 머리에 쓰는 [[관(冠)]], 전후 치마폭이 나뉜 남자의 의례용 치마인 상(裳), 강사포 위에 두르는 [[대대(大帶)]], 원유관복을 입을 때 일상복 위에 가장 먼저 입는 중단(中單), 혁대의 좌우에 한 쌍씩 걸어 내려뜨리는 패(佩) 즉 패옥과 강사포 위로 뒤쪽 허리 아래에 내려뜨리는 [[수(綬)]], 곧 후수(後綬)와 수와 함께 앞쪽으로 허리 아래를 덮어 내려뜨리는 앞치마형의 [[폐슬(蔽膝)]], 붉은색의 버선인 [[말(襪)]]과 붉은색의 신인 석(舃)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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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포를 양관(梁冠)에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1493년(성종 24) 3월 군신과 같은 조복을 착용하여 백관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2021_004 『성종실록』 19년 2월 21일])는 기록으로 보아 왕세자의 원유관복 착용은 이때도 여전히 정착되지 않은 듯하다. 1500년(연산군 6) 고제(古制)를 참작하여 왕세자의 7량 원유관을 시행하도록 하였다고 하니, 이때 비로소 왕세자의 원유관복이 정착된 것으로 짐작된다([http://sillok.history.go.kr/id/kja_10612012_001 『연산군일기』 6년 12월 12일]). | 강사포를 양관(梁冠)에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1493년(성종 24) 3월 군신과 같은 조복을 착용하여 백관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2021_004 『성종실록』 19년 2월 21일])는 기록으로 보아 왕세자의 원유관복 착용은 이때도 여전히 정착되지 않은 듯하다. 1500년(연산군 6) 고제(古制)를 참작하여 왕세자의 7량 원유관을 시행하도록 하였다고 하니, 이때 비로소 왕세자의 원유관복이 정착된 것으로 짐작된다([http://sillok.history.go.kr/id/kja_10612012_001 『연산군일기』 6년 12월 1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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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포는 곧은 깃이 깊게 여며지는 넓은 소매의 옷이다. 깃과 섶, 도련, 소매부리에는 몸판과 같은 옷감으로 넓은 선 장식을 둘렀다. 『국조오례의』 서례 가례조의 「관복도설」에 실린 원유관복의 ‘의’에 해당되는 앞면[衣面]과 뒷면[衣背]의 그림을 통해 강사포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단, 옷의 길이는 명확하지 않으나 중단(中單)보다는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743년(영조 19) 면복의 훈상이 현의(玄衣)에 가려지니 제도를 고쳐서 길이를 줄여 현의와 훈상의 뜻이 나타나게 하라고 한 것을 볼 때, 현의의 길이는 강사포의 길이에도 적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1904014_003 『영조실록』 19년 4월 14일]). | 강사포는 곧은 깃이 깊게 여며지는 넓은 소매의 옷이다. 깃과 섶, 도련, 소매부리에는 몸판과 같은 옷감으로 넓은 선 장식을 둘렀다. 『국조오례의』 서례 가례조의 「관복도설」에 실린 원유관복의 ‘의’에 해당되는 앞면[衣面]과 뒷면[衣背]의 그림을 통해 강사포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단, 옷의 길이는 명확하지 않으나 중단(中單)보다는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743년(영조 19) 면복의 훈상이 현의(玄衣)에 가려지니 제도를 고쳐서 길이를 줄여 현의와 훈상의 뜻이 나타나게 하라고 한 것을 볼 때, 현의의 길이는 강사포의 길이에도 적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1904014_003 『영조실록』 19년 4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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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왕세손이 강사포를 착용한 기록은 특히 영조 때에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역시 관례 때 재가복으로 강사포를 착용하였으며, 1767년(영조 43)에는 왕세손이 시경의에 참여할 때, 1776년(영조 52)에는 경현당(景賢堂)에서 서계를 받을 때와 집경당(集慶堂)에서 영조에게 사배례(謝拜禮)를 행할 때, 그리고 효장묘(孝章墓)에 책인(冊印)을 올리고 예를 행할 때에도 착용하였다. 한편 왕이나 왕세자의 국상에는 소렴의대(小斂衣襨)에 강사포를 착용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고종과 순종의 국상에는 대렴의대(大斂衣襨)에도 강사포를 착용되었다. | 한편, 왕세손이 강사포를 착용한 기록은 특히 영조 때에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역시 관례 때 재가복으로 강사포를 착용하였으며, 1767년(영조 43)에는 왕세손이 시경의에 참여할 때, 1776년(영조 52)에는 경현당(景賢堂)에서 서계를 받을 때와 집경당(集慶堂)에서 영조에게 사배례(謝拜禮)를 행할 때, 그리고 효장묘(孝章墓)에 책인(冊印)을 올리고 예를 행할 때에도 착용하였다. 한편 왕이나 왕세자의 국상에는 소렴의대(小斂衣襨)에 강사포를 착용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고종과 순종의 국상에는 대렴의대(大斂衣襨)에도 강사포를 착용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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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0:5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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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강사포 |
한글표제 | 강사포 |
한자표제 | 絳紗袍 |
상위어 | 관복(冠服), 세자궁법복(世子宮法服), 원유관복(遠遊冠服), 전하법복(殿下法服), 조복(朝服) |
관련어 | 원유관(遠遊冠), 통천관(通天冠), 피변복(皮弁服) |
분야 | 생활·풍속/의생활/의복 |
유형 | 의복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시대~대한제국 |
왕대 | 공민왕~순종 |
집필자 | 이은주 |
용도 | 의례복(儀禮服) |
시기 | 조하(朝賀)를 받을 때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강사포(絳紗袍)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19년 2월 21일, 『연산군일기』 6년 12월 12일, 『영조실록』 19년 4월 14일, 『중종실록』 17년 9월 1일 |
고려시대부터 대한제국시기까지 왕이나 왕세자, 왕세손의 원유관복(遠遊冠服)을 대표하는 붉은색 상의.
개설
원유관복의 구성물인 강색(絳色), 즉 붉은색 상의로서, 삭망(朔望)·조강(朝講)·진표(進表)·조근(朝覲) 등의 조하(朝賀)를 받을 때 착용하였다. 고려 공민왕대에는 명나라에서 원유관복을 하사하였으며, 조선시대의 경우 세종대에 명에서 새로 하사받아 착용하였다.
『고려사(高麗史)』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주로 강사포와 원유관(遠遊冠)이란 명칭이 함께 기록되어 있지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서례(序例)나 그 외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의 국가 전례서(典禮書) 도설(圖說)에는 ‘강사포’라는 용어 대신 ‘의(衣)’로 명시되어 있다.
왕이나 왕세자가 입는 원유관복은 강사포에 해당되는 의(衣)를 비롯하여 손에 드는 규(圭), 머리에 쓰는 관(冠), 전후 치마폭이 나뉜 남자의 의례용 치마인 상(裳), 강사포 위에 두르는 대대(大帶), 원유관복을 입을 때 일상복 위에 가장 먼저 입는 중단(中單), 혁대의 좌우에 한 쌍씩 걸어 내려뜨리는 패(佩) 즉 패옥과 강사포 위로 뒤쪽 허리 아래에 내려뜨리는 수(綬), 곧 후수(後綬)와 수와 함께 앞쪽으로 허리 아래를 덮어 내려뜨리는 앞치마형의 폐슬(蔽膝), 붉은색의 버선인 말(襪)과 붉은색의 신인 석(舃)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원 및 변천
왕의 강사포는 고려시대 공민왕대부터 대한제국시기까지 착용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1370년(고려 공민왕 19) 5월에 명나라 태조가 처음으로 원유관과 강사포를 고려에 보내왔다. 서잠도(犀簪導)를 꽂는 7량(梁)의 원유관에 강사포, 홍상(紅裳), 검은 깃에 청색 수구(袖口), 선 장식을 한 백사(白紗) 중단(中單)과 군유(裙襦), 사(紗) 폐슬, 백가대(白假帶), 방심곡령(方心曲領), 금구첩(金鉤䚢)이 달린 홍혁대(紅革帶), 백말(白襪), 흑석(黑舃)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명나라로부터 면복은 사여(賜與)받았으나 원유관복은 사여받지 못하여 건국 초에는 고려의 원유관복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74년(성종 5) 『국조오례의』 서례 가례(嘉禮)조의 「관복도설(冠服圖說)」에 보이는 원유관복에는 강사포인 의와 함께 규, 관, 상, 대대, 중단, 패, 수, 폐슬, 말, 석이 일습으로 이루어져 있어 고려시대 원유관복 구성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앞서 1437년(세종 19) 9월 명나라에 원유관복을 청하였는데, 이듬해인 1438년(세종 20) 10월에 내린 칙서에 원유관포(遠遊冠袍)를 사여한다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이때 내린 원유관복은 고려 때의 원유관복과 달라서, 고려시대의 원유관복은 별도로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때 명나라에서는 원유관복이 피변복(皮弁服)으로 바뀐 뒤여서, 당시 명나라에서 보낸 원유관복 역시 명나라 친왕의 피변복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제도가 『국조오례의』 서례 가례조의 「관복도설」에 실린 것으로 짐작된다.
방심곡령은 1438년 이후 원유관복의 구성에서 제외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당시 옥대는 없었으나 1776년(정조 즉위)에는 면복의 경우 대대 위에 혁대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므로 원유관복에도 혁대, 즉 옥대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구성은 대한제국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대한제국시기의 황제는 12량(梁)에 12개의 매미 장식을 하고 옥잠을 꽂은 통천관(通天冠)으로 원유관을 대신하였다. 20세기 초의 「고종어진」을 보면, 통천관에 강사포를 착용하고 있다. 또한 1922년 영왕비(英王妃)의 근현례 기념사진에서는 통천관에 강사포를 착용하고 찍은 순종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왕세자는 왕보다 늦게 원유관복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왕세자의 원유관복 도상(圖像)은 영조대의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 서례의 길례(吉禮)조에 있는 「원유관복도설(遠遊冠服圖說)」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에 앞선 『국조오례의』에는 삭망에 왕세자와 백관이 조하하는 의식에서 왕은 원유관복을 입었으나, 왕세자는 조복(朝服)을 착용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왕세자의 관례에는 재가(再加)에 강사포를 착용한다고 하였다.
강사포를 양관(梁冠)에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1493년(성종 24) 3월 군신과 같은 조복을 착용하여 백관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성종실록』 19년 2월 21일)는 기록으로 보아 왕세자의 원유관복 착용은 이때도 여전히 정착되지 않은 듯하다. 1500년(연산군 6) 고제(古制)를 참작하여 왕세자의 7량 원유관을 시행하도록 하였다고 하니, 이때 비로소 왕세자의 원유관복이 정착된 것으로 짐작된다(『연산군일기』 6년 12월 12일).
형태
강사포는 곧은 깃이 깊게 여며지는 넓은 소매의 옷이다. 깃과 섶, 도련, 소매부리에는 몸판과 같은 옷감으로 넓은 선 장식을 둘렀다. 『국조오례의』 서례 가례조의 「관복도설」에 실린 원유관복의 ‘의’에 해당되는 앞면[衣面]과 뒷면[衣背]의 그림을 통해 강사포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단, 옷의 길이는 명확하지 않으나 중단(中單)보다는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743년(영조 19) 면복의 훈상이 현의(玄衣)에 가려지니 제도를 고쳐서 길이를 줄여 현의와 훈상의 뜻이 나타나게 하라고 한 것을 볼 때, 현의의 길이는 강사포의 길이에도 적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영조실록』 19년 4월 14일).
용도
고려시대 공민왕 때는 신하의 조하를 받을 때 원유관과 강사포를 착용하였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이보다 다양한 의례에 강사포를 착용하였다. 『태종실록』에는 원유관·강사포는 군신의 조하를 받는 복장이라고 하고 있으나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때에 착용하였다. 즉 왕의 즉위를 진하하는 의식에, 대제(大祭)의 서계(誓戒)를 행할 때, 종묘·문묘·황단(皇壇) 등에서의 행례를 위해 연(輦)을 타고 출궁했다가 예를 마치고 다시 환궁할 때, 종묘의 신문(神門) 밖에서 희생(犧牲)을 살필 때, 선농단에 나아가 살필 때[奉審], 가례 때의 납징례(納徵禮)와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冊妃儀]에, 문무과 방방(放榜)에, 후궁과의 가례 시 동뢰(同牢) 의식에, 그리고 친경의(親耕儀)와 왕세손의 시경의(侍耕儀)에 참석할 때, 친경(親耕) 후 노주(勞酒) 때, 왕세자의 관례에 참석할 때 등 다양한 의례에서 착용하였다.
조선초기 왕세자는 문무백관과 같은 양관의 조복을 착용하였으나, 1500년(연산군 6) 12월 이후에 본격적으로 원유관복을 입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국조오례의』에 왕세자의 관례 때 재가복으로 강사포를 착용한다고 하였는데, 1522년(중종 17) 9월 세자가 관례 때 사용할 원유관에 쓸 만한 구슬이 없다고 논의하는 것을 보면 이때 이미 세자의 원유관과 강사포 제도가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중종실록』 17년 9월 1일).
한편, 왕세손이 강사포를 착용한 기록은 특히 영조 때에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역시 관례 때 재가복으로 강사포를 착용하였으며, 1767년(영조 43)에는 왕세손이 시경의에 참여할 때, 1776년(영조 52)에는 경현당(景賢堂)에서 서계를 받을 때와 집경당(集慶堂)에서 영조에게 사배례(謝拜禮)를 행할 때, 그리고 효장묘(孝章墓)에 책인(冊印)을 올리고 예를 행할 때에도 착용하였다. 한편 왕이나 왕세자의 국상에는 소렴의대(小斂衣襨)에 강사포를 착용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고종과 순종의 국상에는 대렴의대(大斂衣襨)에도 강사포를 착용되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원유관복은 강사포를 비롯하여 관모에서 신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복식품으로 구성되며, 면복과 함께 왕이나 왕세자·왕세손의 법복(法服)에도 해당되었다. 편의상 강사포를 왕의 조복 상의라고 하지만 왕이나 왕세자의 조복으로 명명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왕이나 왕세자가 강사포를 착용할 때 문무백관이 조복을 입는 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학계에서는 원유관복을 흔히 조복이라고 분류하고 있다. 강사포는 강색(鋼色)이나 홍색(紅色) 등의 사(紗), 라(羅), 초(綃) 등으로 만들었지만, 사용된 옷감의 종류에 관계없이 관행적으로 강사포라고 지칭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
-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상방정례(尙方定例)』
- 고광림, 『한국의 관복』, 화성사, 1990.
- 유희경, 『한국복식사연구』, 이화여자대학교, 197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