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군(扈衛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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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호위청에 소속되었던 군병.

개설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 이전까지 도성에는 궁성 숙위를 위한 소규모의 내삼청(內三廳) 소속의 금군과 수천여 명의 훈련도감 군병이 있었다. 그러나 훈련대장이흥립(李興立)이 반정군과 내통하자 반정군은 도성으로 들어와 창덕궁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은 한성 방어 및 궁궐 숙위 임무가 훈련도감에 집중되어 있어 한성 일대에서 긴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훈련도감의 군권 향배에 따라 정권의 명운이 갈릴 수 있음을 간파하였다. 이에 무너진 숙위 체제 강화를 목적으로 금군과 훈련도감의 부분적 보강과 함께 새로운 숙위 전담 군영의 창설에 착수하였다.

인조반정에 동원된 반정군은 한성 주변의 장단과 이천의 관군과 함께 주요 인물들이 모집한 이른바 사모군(私募軍)이 중심이었는데 그 규모는 김류(金瑬),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이 모은 700여 명과 정두원이 모은 500여 명 정도였다. 반정 직후 정두원의 사모군은 해산하였으나 나머지 500여 명은 7월까지 해산하지 않고 한성에 남아 반정공신의 군사력으로써 숙위 등을 담당하고 있었다. 인조는 이 사모군의 해산을 명하였으나 이귀는 이 군병들을 바탕으로 병력을 확충하여 훈련도감과 함께 한성에서 상주하는 도성 호위군으로 편성할 것을 제안하였다(『인조실록』 1년 7월 15일). 이귀의 건의 직후 기자헌(奇自獻) 등의 역모 사건으로 왕 호위 군영의 창설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8월 이전에 호위청(扈衛廳)이 창설되었다.

창설 당시 호위청은 대장(大將) 4명과 당상관 2명을 정하여 사모군 중에서 대장은 각 100명, 당상관은 50명씩 군관(軍官)으로 뽑아 왕의 호위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호위청은 군관 500명 정도로 최초 편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호위대장으로는 이서(李曙), 김류, 신경진(申景禛), 이귀가 임명되고 김자점과 심기원이 당상관에 각각 임명되었다. 호위청의 군관은 500명이었으나 당시의 어려운 재정 상황으로 인하여 정원은 400명으로 정하고 번(番)을 나누어 호위청에 숙직하면서 궐내에서 근무하도록 하였다(『인조실록』 1년 윤10월 6일). 정원은 400명으로 정해졌지만 교대하여 근무하는 형태를 취하였으므로 각 대장이나 당상관들은 각 지방의 무사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하였다. 이에 따라 호위청 군관의 수효는 이듬해 3월이 되면 이미 1,000명에 달할 정도로 확대되었다(『인조실록』 2년 3월 19일).

담당 직무

호위청은 기본적으로 왕 호위와 궁궐 숙위가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호위군들은 평소에 10명이 한 영(領)으로 편성되고 3영이 한 번(番)이 되어 입직하도록 하였는데 한 번 입직할 경우 5일간 연속 근무하였다. 입번할 경우 궐내와 궐외로 나누어 근무하였는데 궐내의 입번은 30명, 궐외는 9명이며 지휘자는 3명으로써 총 42명이었다. 근무하는 입직소(入直所)는 인정문(仁政門) 밖의 월랑(月廊), 영자문(令紫門) 정전(正殿) 월랑 및 그 중간 지점의 만나는 곳이었다. 궁궐 밖의 남산이나 동소, 북소 등에 파견 근무하는 경우도 있었다. 급료를 받지 못하는 군관 이른바 재가대변군관(在家待變軍官)은 집에 있으면서 변란에 대비하거나 변란을 기찰(譏察)하도록 하였다.

왕이 행행(行幸)할 경우에는 입직하는 군관 이외에 재가대변군관들까지도 모두 동원하여 금호문(金虎門), 대보단(大報壇), 비변사(備邊司) 앞길이나 돈화문(敦化門) 밖 등에 진을 치고서 도성 수비에 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왕이 도성 안의 성균관, 사직단 등에 출영할 때나 혹은 한강변의 노량(鷺梁) 백사장에서 군병을 열무(閱武)할 때에도 호위군들이 별장(別將) 등의 지휘하에 왕의 시위(侍衛)에 참가하거나 왕의 처소 근처를 경호하기도 하였다.

변천

호위군 창설 직후인 1624년(인조 2) 1월 이괄의 난이 일어나 도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따라 도성 방위와 궁중 숙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함경남·북도에 명하여 무과 출신자 중에서 특별히 우수한 자를 함경감사와 병사(兵使)가 함께 시재(試才)하여 한성으로 뽑아 올리도록 하였다. 아울러 이괄의 난에서 공을 세운 자를 호위군으로 편입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호위청은 이전보다 규모가 상당히 커지게 되었다. 호위군의 일부는 곧 확대되는 어영청 등 중앙 군영의 기간요원으로 충원되기도 하였다.

호위청의 규모가 확대되어 천여 명이 되자 4대장 6당상관 체제로 변화하였다. 대장 한 사람이 거느릴 수 있는 호위군관의 수는 140명, 당상관은 80명으로써 총 1,040명이 되었으나 그중 급료를 받는 호위군은 대장 각 60명, 당상관 30명으로 제한되어 420명이었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적극적인 북벌 추진의 일환으로 호위청도 기존 2청(廳) 체제에서 4청으로 개편되었고 급료를 받는 호위군도 각 청에 140명으로 정하여 560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현종대 들어 정태화(鄭太和)의 주장으로 호위청은 3청 체제로 약간 축소되었다. 1684년(숙종 10) 청성부원군김석주(金錫冑)의 건의로 다시 이전의 규모를 회복시켰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3청 체제로 돌아왔다.

정조 즉위 초인 1777년 8월 벽파인 홍상범(洪相範)이 호위청 군관과 공모하여 심야에 왕의 침전까지 침입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이후로 1778년(정조 2) 2월 호위청의 3청을 1청으로 축소하고 호위대장도 의정(議政)이나 국구(國舅)가 겸하게 하였다. 군관의 수도 350명으로 축소시켰다. 이 조치 이전에는 3청 중 한 청은 국구가, 나머지 두 청은 대신 중에서 호위대장을 겸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조치로 대신의 호위대장 겸직을 배제하였다(『정조실록』 2년 2월 5일).

그 후 1793년 새로운 군영인 장용영(壯勇營)이 창설되면서 장용영 도제조에게 호위대장을 겸임하게 함으로써 호위청은 사실상 장용영에 흡수되었다. 1798년 우의정심환지가 호위대장에 임명되면서 장용영 도제조를 겸직하는 제도를 폐지함으로써 호위청은 다시 장용영에서 독립하였다. 순조 즉위 직후인 1800년(순조 즉위) 9월 호위청은 재정적으로도 독립하여 이전의 지위와 역할을 회복하였다.

19세기 초 『만기요람』에 나타난 당시 호위청의 규모는 3품 당상의 무반인 별장(別將: 한자 삭제) 1명, 소임군관(所任軍官) 4명, 그리고 군관 400명이었다. 이 중 급료를 지급받는 것은 95명으로, 그중 90명은 3번으로 나누어 영장(領將) 3명이 30명씩 거느리고 궐내에 입번하고 나머지 5명은 윤번으로 대장소(大將所)에 입번하였다. 왕이 교외로 행행할 때에는 궐내에 입번하는 자를 15명 늘려 유도대신(留都大臣)이 지휘하였고, 대궐 밖의 정해진 곳인 금호문 북쪽에서 공북문(拱北門) 앞길까지 세워서 호위하게 하였다. 호위청에는 군관 이외에 각종 명목의 보조 군사들이 약간 명 편성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만기요람』에 의하면 19세기 초에는 일종의 헌병인 뇌자(牢子) 10명, 순령수(巡令手) 10명, 등룡군(燈龍軍) 10명, 표하군(標下軍) 12명, 사후군(伺候軍) 6명, 장막군(帳幕軍) 20명 등이 있었다.

호위청은 1881년(고종 18) 12월 종래의 군영인 무위소,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용호영, 호위청 등을 통폐합하여 2개의 군영인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으로 개편하는 군제 개혁 조치에 의해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호위청등록(扈衛廳謄錄)』
  • 이태진, 『조선 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최효식, 『조선 후기 군제사 연구』, 신서원, 1995.
  • 윤훈표, 「조선 후기 동궐의 숙위 체계의 변화」, 『서울학연구』3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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