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녕군 이인(諴寧君 李䄄)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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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함녕군 이인 |
한글표제 | 함녕군 이인 |
한자표제 | 諴寧君 李䄄 |
분야 | 왕족/왕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전기 |
왕대 | 세종~세조 |
집필자 | 윤경수, 김구진 |
자 | 정경(整卿) |
봉작 | 함녕군(諴寧君), 공녕군(恭寧君) |
시호 | 양정(襄靖), 정민(貞敏) |
출신 | 양반, 왕족 |
성별 | 남자 |
출생 | 1403년(태종 3) |
사망 | 1467년(세조 13)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산 41번지 |
증조부 | 이자춘(李子春) |
조부 | 이성계(李成桂): 태조(太祖) |
부 | 이방원(李芳遠): 태종(太宗) |
모_외조 | 신신빈(辛信嬪): 신녕궁주(信寧宮主), 영월 신씨(寧越辛氏), 신영귀(辛永貴)의 딸 |
형제 | (동생)이정(李䄇): 온녕군(溫寧君) (동생)이농(李禯): 근녕군(謹寧君) |
처_장인 | 전주 최씨(全州崔氏): 최사강(崔士康)의 딸 →(자녀)1남 2녀 |
자녀 | (1자)이민(李敏): 덕성정(德城正) (1녀)윤오(尹塢)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함녕군 이인(諴寧君 李䄄) |
총론
[1403년(태종 3)~1467년(세조 13) = 65세]. 조선 초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태종(太宗)이방원(李芳遠)의 서출 8남 13녀 중에서 제 2왕자. 봉작(封爵)은 처음에 공녕군(恭寧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함녕군(諴寧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자는 정경(整卿)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신신빈(辛信嬪)는 영월 신씨(寧越辛氏)로서 신영귀(辛永貴)의 딸이다. 신신빈이 낳은 3남 7녀 중에서 맏아들인데, 온녕군(溫寧君)이정(李䄇)과 근녕군(謹寧君)이농(李禯)의 동복형이다.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찬성(贊成)최사강(崔士康)의 딸인데,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태종~세종 시대 활동
1402년(태종 2) 태종의 서출 제 2왕자로 태어났다. 1413년(태종 13) 정윤(正尹)이 되고, 1414년(태종 14) 원윤(元尹)이 되었다. 1416년(태종 16) 2월 나이 14세 때 찬성최사강의 딸과 혼인하였다. 1417년(태종 17) 9월 공녕군으로 봉해지고, 부인 최씨는 공신택주(恭愼宅主)로 봉해졌다.
1422년(세종 4) 상왕인 태종이 병상에 있을 때 세종과 함께 상왕 가까이 임시 침소를 마련하여 주야로 간병하였다. 이 해 5월에 아버지 태종이 승하하자, 빈전(殯殿)에 입직(入直)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 그의 효성이 지극함을 보였다. 어머니 신녕궁주(信寧宮主)신씨(辛氏)는 태종이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으므로, 태종이 돌아가자, 세종에게 알리지도 않고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1424년(세종 6)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 공녕군에 진봉해졌다.
1429년(세종 11) 11월 29일 왕명을 받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금과 은을 세공(歲貢)으로 바치는 것을 면제해 주기를 명나라 선덕(宣德)에게 주청(奏請)하여 우마(牛馬)와 포목(布木)으로 대신 바쳐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돌아왔다. 1430년 1월 정1품상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공녕군이 되었다. 1433년(세종 15) 공정대왕(恭定大王)의 시호인 홍녕(弘寧)과 서로 비슷하다 하여, 봉작을 함녕군으로 개봉하였다.
1435년(세종 17) 어머니 신녕궁주의 상을 당하였다. 1467년(세조 13) 9월 30일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금 · 은 세공(歲貢)의 면제
1429년(세종 11) 8월 세종은 명나라에 금은(金銀)의 세공(歲貢)을 면제하기를 주청하는 계품사(計稟使)에 함녕군이인(李䄄)을 임명하였다. 함녕군이인은 부사(副使) · 종사관(從事官) 등 42명을 거느리고 명나라로 가서 총 945자로 쓰여진 표문(表文)을 명나라 선덕제(宣德帝)에게 올렸는데, 그 표문에서, “조선에서는 금은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금은의 세공을 면제해 주고 그 대신에 토산물(土産物)을 바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명나라 이부 상서(吏部尙書)건의(蹇義) 등이 “태조 황제가 만들어 놓은 법을 고칠 수 없다.” 반대하였으나, 선덕제는 “조선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인데, 조공 사신이 자주 오는데, 그 공물은 대개 금은인데, 작은 나라에서 어찌 능히 감당하겠는가.” 하고, 금은의 면공(免貢)을 허락하였다. 이때 조선 출신 환관(宦官)윤봉(尹鳳)이 선덕제에게 조선에서 금은이 생산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다른 토산물로써 대신하도록 황제의 허락을 얻어내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윤봉은 조선에서 보낸 화자(火者) 출신 환관으로서 어렸을 때 선덕제를 업어서 키운 사람이었다. 윤봉은 명나라 환관의 우두머리인 태감(太監)에 있었으므로, 세종 때 조선에 사신으로 자주 나왔는데, 세종이 금은의 세공을 면제하여 주도록 태감윤봉에게 거듭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때 금은의 면공은 조선의 외교사에 큰 획을 걷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명나라 태조주원장(朱元璋)은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주변의 80여 나라에게 각 나라의 특산물을 예물(禮物)의 형식으로 명나라 황제에게 바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은 금은 · 나전칠기 · 흰 비단 · 각색 모시 · 용무늬 대자리 · 각색 화문석(花紋席) · 표피(豹皮) · 수달피 · 붓 · 조선 종이 · 인삼 · 종마(種馬)의 12가지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부담하기가 어려운 것이 해마다 황금 1백 50냥과 백은 7백냥을 명나라 에 보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원나라 때부터 고려에 부과하였는데, 조선에서는 금은이 본국의 토산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면공하고 다른 토산물로 대체하도록 명나라에 요청한 지 오래 되었는데, 1429년(세종 11) 함녕군이인이 선덕 황제에게 주청하여 마침내 성공하였던 것이다. 함녕군이인은 조선 외교사에서 가장 큰 문제였던 <금은 면공>과 <종계변무(宗系辨誣)> 2대 과제 중에서 금은의 면공을 이루어 조선 외교사에서 큰 업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세종이 금은의 면공을 주청하는 계품사에 이복 동생 함녕군이인을 임명한 것은 그의 외교적 수완과 조리 있는 언변을 높이 평가하였던 결과이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활달하고 언변이 뛰어났다. 1429년(세종 11) 계품사로서 명나라 북경에 가서 금은의 세공을 면제 받고 돌아올 때 선덕 황제가 함녕군이인에게 중국 비단옷 4벌과 표리(表裏) 10필을 비롯하여 금대(金帶) · 서대(犀帶) 각각 1개씩과 은화(銀貨) 1백 냥 등을 선물로 주었는데, 당시 명나라에서 조선의 사신은 물소뿔로 만든 서대를 허리에 찰 수가 없었는데, 함녕군이 이것을 받자마자 바로 착용하였기 때문에 그때부터 우리나라 사신들도 중국에서 물소뿔 관대를 찰 수 있게 되었다.
외국 사신들이 북경에 오면, 회동관(會同館)에 머물고, 조선의 사신은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렀는데, 활을 일상 사용하는 달자(達子)의 사신들이 태감윤봉에게 요청하기를, “조선 사신 함녕군이 활을 잘 쏜다는 말을 들었는데, 특별히 강궁(强弓)을 가지고 한번 시합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므로, 함녕군이인이 이를 흠쾌히 승낙하고, 회동관으로 가서 활쏘기 시합을 했다. 함녕군이인이 강궁을 힘껏 당겨서 활을 쏠 때마다 백발백중으로 과녁을 맞혔으므로, 시합을 구경하던 외국 사신들과 달자 사신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계품사함녕군 일행은 4개월 이상 명나라에 머물면서 금은을 면공한다는 명나라의 칙서를 받아 가지고 그해 12월 말에 돌아왔다. 세종은 크게 기뻐하여, 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으로 나가서 사신 일행을 맞이하였다. 이어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그 공로를 포상하였는데, 함녕군은 논 80결과 노비 8명을 하사 받았다.
1452년 윤9월 단종이 즉위하고 사정전(思政殿)에서 종친들을 인견(引見)하고 하사품을 내려줄 때 함녕군도 입시(入侍)하였다. 1453년(단종 1) 2월 세조가 명나라에 가서 예부의 자문(咨文)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복명하니, 단종이 연회를 베풀어 세조를 위로할 때 함녕군도 연회에 자리를 같이 하였다. 같은 해 5월 세조가 단종의 혼인을 서두를 때 종친들과 함께 단종에게 왕비를 맞이하도록 청하였다. 1454년(단종 2) 단종이 함녕군에게 말 1필을 내려 주었다.
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하자, 공신들이 모여서 삽혈(歃血)하고 세조에게 충성을 맹세를 할 때 맹세하는 글[誓詞]과 참석자의 명단을 기록한 족자(簇子)를 세조에게 바쳤는데, 함년군도 그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그 모임에 참석하였다. 세조가 공신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난신(亂臣)들의 노비와 전지도 나누어 주었는데, 함녕군도 이 연회에 참석하고 노비와 전적을 받았다. 여기서, 함녕군은 세조가 왕위에 오를 때, 세조를 지지하였거나, 적어도 반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묘소와 후손
1467년(세조 13) 시호가 양정(襄靖)이었으나, 나중에 정민(貞敏)으로 고쳤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도심촌에 있다. 경상도 구미(仇彌)에 있는 영민사(英敏祠)에 제향되었다.
부인은 전주 최씨최사강의 딸인데,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덕성정(德城正) 이민(李敏)이고, 1녀는 윤오(尹塢)의 처가 되었다. 덕성정 이민에게 후사가 없자, 임영대군(臨瀛大君)이구(李璆)의 아들인 팔계군(八溪君)이정(李淨)을 양자로 삼았다. 이정의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윤여필(尹汝弼)의 딸인데, 중종의 왕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와 자매간이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순암집(順菴集)』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파극집(靑坡劇談)』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