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품사(計稟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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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조선초, 긴급한 안건 처리 등을 위해 명나라에 임시로 파견한 사신.

개설

고려말기에는 원(元)·명(明) 교체로 국제 정세가 복잡해졌다. 이로 인해 긴급한 현안이 종종 발생하여 계품사(計稟使)라는 명목으로 사신이 임시로 파견되었다. 이는 조선초기에도 계속되었다. 조선초에는 명나라와의 정세가 미묘했던 관계로 처리 안건이 심각한 편이었다. 명나라의 정난(靖難)의 변과 조선의 왕자의 난 등으로 명나라와 조선 모두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양국 간 긴장 관계가 완화되었다. 이후 동북(東北) 지방(地方)의 여진인(女眞人) 처리 문제로 계품사가 파견되는 등 안건의 강도가 낮아졌다. 세종 이후에는 파견되지 않았다.

담당 직무

계품사는 대체로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 발생했던 여러 다양한 내용의 긴급한 안건의 처리를 위해 파견되었다. 조선왕조 개창 직후에는 당시의 상황이 반영되어 매우 심각한 사안을 가지고 갔다. 1392년(태조 1)에 보낸 조임(趙琳)의 경우 공양왕에서 태조로 왕이 바뀐 것을 명나라에 전하며 그 승인을 청하는 임무를 맡았다(『태조실록』 1년 11월 27일).

1396년에 파견된 정총(鄭摠)은 인신(印信)과 고명(誥命)을 청하는, 곧 정식으로 조선의 왕으로 임명한다는 증서를 받아내는 일을 담당했다(『태조실록』 5년 3월 29일). 당시 명나라에서는 이전에 조선이 보냈던 표문(表文) 등에 불손한 내용이 많았다며 표문과 관련된 사람들을 압송하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변명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같은 해인 1396년에 하윤(河崙)이 파견되었다(『태조실록』 5년 7월 19일).

이렇듯 당시 두 나라 사이에 긴장 관계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심각한 내용의 현안 처리를 위해 계품사를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희생되는 사람이 간혹 발생하기도 했다.

변천

명나라에서 정난의 변이 일어나 건문제(建文帝)를 대신하여 1402년에 영락제(永樂帝)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조선에서도 1398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권이 교체되었으며 1400년에는 태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를 계기로 양국 간의 관계가 급속하게 호전되었다. 그것이 계품사의 파견에도 영향을 미쳤다.

1404년(태종 4)에 김첨(金瞻)은 우리의 동북 지방에 사는 여진인에 대한 관할권을 요청하는 임무를 가지고 명나라에 파견되었다(『태종실록』 4년 5월 19일). 명나라에서는 여진인뿐만 아니라 고려인이 요동에 가서 정주하다가 명나라 정난의 변 등으로 다시 귀국한 이른바 요동의 만산군(漫散軍)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1408년 권완(權緩)을 계품사로 파견하여 만산군의 실상을 전하였다. 이렇듯 태종 즉위 이후에는 이전에 비해 긴장 강도가 떨어지는 사안을 전하였다.

세종 때에 이르기까지는 동북 지방의 여진인 처리나 4군 6진 등의 개척과 연관된 국경 문제 등으로 계품사가 자주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외교 관계가 점차 안정되면서 긴급한 현안이 대폭 줄어든 탓인지 계품사가 파견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김순자, 『한국 중세 한중관계사』, 혜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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