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해(鄭載海)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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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재해 |
한글표제 | 정재해 |
한자표제 | 鄭載海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현종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여근(汝根), 여진(汝振)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32년(인조 10) |
사망 | 1662년(현종 3) 12월 |
본관 | 동래(東萊) |
주거지 | 서울, 수원(水原)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수원부(水原府) 갈곡(葛谷) |
증조부 | 정창연(鄭昌衍) |
조부 | 정광성(鄭廣城) |
부 | 정만화(鄭萬和) |
모_외조 | 청송 심씨(靑松沈氏); 심기주(沈器周)의 딸 |
형제 | (동생)정재한(鄭載漢) |
처_장인 | 안동 김씨(安東金氏) : 김일(金逸)의 딸 →(자녀)2남 1녀 |
자녀 | (1자)정시선(鄭是先) (2자)정복선(鄭復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재해(鄭載海) |
총론
[1632년(인조 10)~1662년(현종 3) = 31세]. 조선 중기 효종(孝宗)~현종(顯宗) 때의 문신. 병조 좌랑(左郞) 등을 지냈다. 자는 여진(汝振), 또는 여근(汝根)이다. 본관(本貫)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판(參判)정만화(鄭萬和)이고, 어머니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심기주(沈器周)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형조 판서(判書)정광성(鄭廣城)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정창연(鄭昌衍)이다.
효종 시대 활동
1654년(효종 5)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다.[『방목(榜目)』]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는데, 1657년(효종 8) 효종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성균관 유생(儒生)들에게 시강(試講)하게 하였을 때 정재해(鄭載海)가 장원을 하자, 바로 회시(會試)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8년 8월 15일] 그해 8월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방목』]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고, 승정원(承政院)가주서(假注書)로 선발되어 입시(入侍)하였는데, 행동거지가 법도에 들어맞고 일을 기록하는 것이 민첩하여 효종의 관심을 받았다.[『약천집(藥泉集)』 권19 「병조좌랑정공묘갈명(兵曹佐郞鄭公墓碣銘)」 이하 「정재해묘갈명」으로 약칭]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고, 전례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는데, 이때 그의 큰아버지 정태화(鄭太和)가 영의정으로서 사국(史局)을 총괄하고 있었으므로 관례상 당연히 피혐(避嫌)해야 하였다. 이에 승정원에서 다시 임명하도록 계청하였는데도 재차 임명하자, 또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얼마 후 예문관 검열(檢閱)에 천거되었으나 이때에도 피혐하고 명을 받지 않았다.[「정재해묘갈명」]
1661년(현종 2) 정태화가 벼슬을 사직하게 되자, 비로소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에 예문관 검열(檢閱)에 옮겼다가, 대교(待敎)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때 정태화가 다시 수상이 되었으므로, 그는 또 체직되었다.[「정재해묘갈명」]
1662년(현종 3) 봉교(奉敎)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에 승진되었고, 뒤이어 사헌부 감찰(監察)로 옮겼다. 이때 아버지 정만화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있었으므로, 벼슬을 그만두고 그곳에 가서 문안을 드렸는데, 도중에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지만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 해 12월에 갑자기 역질(疫疾)에 걸려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대구감영(大邱監營)에서 죽었는데, 향년이 31세였다. 부음(訃音)이 서울에 알려지자 그를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모두 깜짝 놀라 애도하고 가슴 아프게 여겼으며, 혹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정재해묘갈명」]
성품과 일화
정재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었다. 겨우 열다섯이 되었을 때 어버이의 병을 마치 어른처럼 시중들면서 밤낮으로 나태하지 않았으므로, 일가의 장로들이 모두 찬탄하고 기특하게 여겼다. 글을 배우기 시작하게 되어서는 총명하고 특출하여 무리에서 뛰어났으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널리 배워 마치 자기 말을 외우듯이 척척 암송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더욱 몸가짐을 조심하고 수양하여 행실이 글재주보다 더 훌륭하였다.[「정재해묘갈명」]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였을 때 몸가짐과 행실이 침착하고 여유로웠으며, 논의(論議)가 올바르고 겸손하였으므로, 여러 유생(儒生)들이 모두 그에게 쏠리어 그와 교제하기를 원하였다. 글을 가르치는 사장(師長)도 또한 그를 공경하고 중시하여 남의 제자로 대하지 않았다.[「정재해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수원부(水原府) 갈곡(葛谷)에 있는데,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정재해묘갈명」]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절도사(節度使)김일(金逸)의 딸이다. 자녀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정시선(鄭是先)이고, 차남은 정복선(鄭復先)이다. 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정재해묘갈명」]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약천집(藥泉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