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화(柳世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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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4년(연산군 10)∼1554년(명종 9) = 51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으로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냈다. 자(字)는 백실(伯實)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전라도 전주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유팽성(柳彭成)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다. 청송부사(靑松府使)유세무(柳世茂)의 형이다. 양곡(陽谷)소세양(蘇世讓)에게 시문(詩文)을 배웠다. 전주 유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유혼파(柳渾派) · 유습파(柳濕派) · 유지파(柳池派) 3파가 있는데, 유팽성과 유세화 · 유세무 3부자는 유혼파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중종 시대 활동

어릴 때부터 사부(詞賦)를 잘 지었는데, 문장가 소세양이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있을 때, 유세화는 전주 향교(鄕校)에서 과거 공부를 하면서, 젊은 선비들과 함께 문장을 겨루어 언제나 뚜렷이 두각을 드러내었으므로, 소세양의 칭찬을 받았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고, 뒤이어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8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처음에 교서관(校書館)에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다가, 저작(著作)박사(博士)로 승진하여, 종6품의 내자시(內資寺)주부(主簿)로 승진하였다. 조금 뒤에 정6품의 공조 좌랑 · 호조 좌랑으로 옮겼다.[『양곡집(陽谷集)』 권12 「유장흥 묘갈명(柳長興墓碣銘)」]

1538년(중종 33)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전라도무주 현감(茂朱縣監)이 되었다. 무주 현감으로 있었던 6년 동안 고을을 잘 다스리니, 치적(治積)이 훌륭하다 하여 정5품의 예조 정랑(正郞)으로 발탁되었다. 해운 판관(海運判官)으로 옮겼다가, 1544년(중종 39)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이 되어, 많은 성균관 유생들을 가르쳤다. 다시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김제 군수(金堤郡守)가 되었는데, 무주 현감 때처럼 고을을 잘 다스렸다.[『양곡집』 권12 「유장흥 묘갈명」]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전라도에 흉년이 들었을 때 나라에서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여 각 고을의 재해 상황을 조사하였는데, 김제 고을에서 재해를 제때에 구제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군수유세화를 파직하였다. 그때 조정에서 좌찬성(左贊成)소세양 등이 유세화가 관직을 떠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김제 군수를 유임하도록 계청(啓請)하였으나 명종이 허락하지 않았다.[『양곡집』 권12 「유장흥 묘갈명」] 유세화는 고향 전주로 돌아가서 마침 중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 유팽성(柳彭成)를 간호하였는데, 몇 년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마침내 부친상을 당하자, 아버지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한결같이 『주자 가례(朱子家禮)』대로 치상(治喪)하였다. 새벽에 닭이 울면 일어나서 몸소 제청(祭廳)을 쓸고 아버지에게 올릴 음식을 손수 마련하였다. 유세화 형제는 죽만 먹으면서 3년상을 마쳤는데, 완산에서 전주의 어머니를 뵈러 갈 때에도 한번도 전주집에서 자고 오지 않았다. 이러한 효성과 행적이 조정에 보고되자, 3년 상례를 끝마친 다음에 1550년(명종 5) 유세화는 전라도장흥부사(長興府使)에 승진 · 임명되었다. 그때 부사유세화의 품계는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였다.[『양곡집』 권12 「유장흥 묘갈명」, 『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5년 3월 18일] 장흥에는 토호(土豪)가 많아서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므로, 장흥부사유세화가 분노하여 법에 따라 토호들을 엄격하게 단속하였다. 그러자 토호들이 조정에 그를 모함하여, 1553년(명종 8) 부사에서 파직되어 고향 전주로 돌아왔다.[『양곡집』 권12 「유장흥 묘갈명」] 1554년(명종 9) 봄에 갑자기 병에 걸려서, 전주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51세였다. 그는 문장이 화려하다고 칭찬을 받았으나, 그의 문집(文集)이 간행되지 않아서 남아 있는 시문은 별로 없다.

성품과 일화

유세화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그의 묘갈명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양곡집』 권12 「유장흥 묘갈명」] 그는 몸가짐이 차분하고 온아(溫雅)하였으며, 목소리가 맑고 화창하였다. 천성이 신중하고 성실하여 부화(浮華)를 좋아하지 않았다. 부모를 섬기는 데에 효도를 다하였고, 아우를 대하는 데에 우애를 다하였다. 친구들과 사귀는 데에 믿음이 있었고, 종족들과 어울릴 때에는 화목하였다. 벼슬에 나아가서 공직을 맡아서는 조금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취사(取捨)하는 바가 없었다. 평소 산업(産業)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검소하게 사는 것을 가훈(家訓)으로 삼았다. 항상 대의(大義)를 독실하게 실행하였기 때문에 처음에 지방에서 신망을 받았고, 마침내 중앙 정부에까지 알려져서 크게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김제 군수로 부임했을 때 유능한 관리라는 소문이 났다. 김제 고을은 땅이 넓고 백성들이 많아서, 진정하는 소송(訴訟)은 태산처럼 쌓이고 사족(士族)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군수유세화는 평상시에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담소하다가, 정사를 볼 때에는 소송 사건을 물 흐르듯이 결단(決斷)하니, 책상 위에는 정체된 소송 문서가 없었다. 그러므로 유세화가 정사를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남부 지방에서 치적(治積)이 으뜸이 되었다.

아버지 유팽성은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아홉 번이나 대과에 낙방하자, 전주에서 서당을 열고 고을 자제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면서, 자기 두 아들 유세화와 유세무도 아울러 교육하면서 시문(詩文)도 훈련하였다. 유세화와 유세무가 모두 대과에 급제한 것도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과 정성스러운 뒷바라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팽성이 오래도록 중한 병을 앓았는데, 유세화 형제는 몸소 요강을 받들고 아버지 대소변을 받아냈다. 약은 반드시 먼저 맛을 보면서 온갖 간호를 다하였다. 또 유세화와 유세무 형제는 우애가 남달랐는데, 형 유세화는 자기가 살던 집과 타던 말을 그 아우 유세무에게 주어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그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유세화는 나흘 동안 미음도 마시지 않다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여묘살이를 할 때에는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조석으로 형제가 나란히 손수 마련한 음식을 아버지의 영전에 올리고 슬피 곡읍(哭泣)하기를 『주자 가례』보다 더하였다. 그때 아버지에게 올릴 음식을 반드시 형제가 손수 마련하고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완주군 봉동에 있는데, 지금 전주 첨단과학 단지가 있는 자리이다. 양곡(陽谷)소세양(蘇世讓)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양곡집(陽谷集)』 권12 「유장흥 묘갈명(柳長興墓碣銘)」] 유세화가 갑자기 돌아가자, 동생 유세무가 형의 행장(行狀)을 지어서, 유세화의 장남 유진(柳晉)을 당대 제일의 문장가인 좌찬성소세양에게 보내어 그 비문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이다.

부인은 내금위(內禁衛)김유극(金有極)의 딸이고, 4남 4녀를 두었다. 장남 유진은 1546년(명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차남 유보(柳普)는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대과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사위는 김영정(金永貞) · 한효청(韓孝淸) · 김여건(金汝楗)이다.[『양곡집』 권12 「유장흥 묘갈명」]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양곡집(陽谷集)』
  • 『동상집(東湘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