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지보(諭書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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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서(諭書)에 사용한 행정용 어보.

개설

조선시대에는 한 지방의 군사권을 위임받은 관리가 왕명 없이 자의로 군사를 발동하거나 역모를 위해 군사를 움직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밀부(密符)의 제도가 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밀부의 우부(右符)관찰사(觀察使)·절도사(節度使)제진(諸鎭)에 주고, 좌부(左符)는 궁궐 안에 간직한다. 만약 징병(徵兵)할 때에는 교서(敎書)를 내려서 좌부를 우부와 맞추어 본 뒤라야 징발(徵發)에 응한다.”고 하였다.

비상의 명령이 내려지면 해당 관원이 간직하고 있던 반쪽의 밀부와 왕이 보낸 반쪽의 밀부를 맞추어 의심할 바가 없을 때 명령대로 거행한 것이다. 이때 왕이 보낸 교서가 바로 ‘유서지보(諭書之寶)’가 찍힌 유서에 해당한다. 기존 유서에 대한 개념은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조선시대 왕이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내렸던 문서로, 각 지방으로 부임하는 관찰사·절도사·방어사(防禦使)·유수(留守) 등에게 왕과 해당 관원만이 아는 밀부를 내리면서 함께 발급하는 명령서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유서의 범위는 이보다 넓은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서를 발급 사유 및 수록한 내용에 따라서 분류하면 밀부유서(密符諭書)를 비롯하여 포상유서(褒賞諭書), 훈유유서(訓諭諭書), 관원을 부르는 유서 등이 있다. 밀부유서는 국왕이 각 지방으로 부임하는 관찰사·절도사·방어사·유수 등에게 국왕과 해당 관원만이 아는 밀부를 내리면서 함께 발급한 명령서이다. 밀부유서의 문서식은 16세기 후반에 한 차례 변화하였고, 『전율통보(典律通補)』에는 조선후기에 발급된 문서식이 기재되어 있다.

포상유서는 왕이 상급 관원의 보고를 통하여 공적이 있는 관원에게 하사품을 내리면서 함께 발급한 문서이다. 새서표리(璽書表裏), 새서숙마(璽書熟馬) 등을 내려 주라는 왕명이 있을 때에 포상유서와 하사품을 내려 주었다. 훈유유서는 왕이 일반 백성 및 관원에게 훈유(訓諭)하거나 효유(曉諭)하는 내용을 기재한 문서이다.

관원을 부르는 유서는 왕이 지방에 있는 관원을 부르는 경우에 발급하는 유서이다. 왕이 유서로 관원을 부르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긴급한 일로 지방에 있는 관원을 부르는 경우, 둘째, 영의정(領議政)·좌의정(左議政)·우의정(右議政)으로 임명된 관원이 지방에 있을 때 왕이 유서를 내려 해당 관원을 올라오게 하는 경우, 셋째, 사직 상소를 올린 관원에게 국왕이 사직을 만류하고 해당 관원을 부르는 경우에 유서를 발급하였다.

연원 및 변천

유서의 기원은 고려의 선전소식(宣傳消息)에 있다. 고려 말에 왕에 의해 번거로이 내려지던 선지(宣旨)에서 일부 기능이 분화된 문서로, 왕의 명령을 중추원(中樞院) 승선(承宣)이 작성하여 전달한 것이다. 또 군정(軍政)과 관련된 명령과 일부 국가의 정책이나 국왕의 개인적인 명령을 전달하는 내전소식(內傳消息)이 있었다. 조선에 들어 1443년(세종 25) 고려의 유제(遺制)인 내전소식을 폐지하고 유서를 처음 시행하여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때 유서식의 변화상을 살펴보면, 첫 면에 ‘유(諭)’ 자와 수취인의 관직, 성명을 쓰고 결사(結辭)에는 ‘고유(故諭)’를 쓴다. 문서의 말미에는 날짜를 쓰고 어보인 유서지보를 찍었다.

형태

조선시대에 유서지보를 처음 제작한 시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유서지보를 사용한 사례는 1444년(세종 26) 『정식유서(鄭軾諭書)』에서 처음 발견된다. 이후 1457년(세조 3) 「이윤손유서(李允孫諭書)」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안보(安寶)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보물 제1289호인 「이윤손유서」는 3월 12일 세조가 평안도절제사이윤손(李允孫)에게 내린 유서로, 역모에 의해 군사를 함부로 움직이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기 위한 내용이다.

이 문서에 안보된 유서지보의 재질은 확인할 수 없으며, 크기는 사방 10㎝, 서체는 소전(小篆)이다. 사용 기간은 유서를 처음 사용한 1443년 이후부터 새로운 유서지보를 제작한 1495년(연산군 1)까지로 비정할 수 있다. 연산군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용한 유서지보의 재질은 옥(玉)이며, 서체는 원전(圓篆, 소전)으로 ‘유서’ 두 자만으로 제조하였다고 하였다. 해당 고문서를 살펴보면 재질은 알 수 없고, 서체는 동일하나 보문이 ‘유서지보’이므로 기록과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 유서지보 외에 연산군대 이전까지 사용한 또 다른 유서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서지보를 처음으로 사용한 1443년보다 약 52년 뒤인 1495년(연산군 1) 연산군은 새로운 유서지보를 시명지보의 크기와 같게 제조하되 은제 도금으로 할 것을 명령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5월 16일). 그로부터 1개월이 채 안 되어 새로운 어보를 완성하여 팔도의 관찰사에게 유시(諭示)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6월 14일). 이때 새로 제작한 유서지보의 안보 사례는 권주종손가소장문적(權柱宗孫家所藏文籍)에 포함된 1503년(연산군 9) 「권주유서(權柱諭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서는 당시 경상도관찰사권주(權柱)에게 역모에 의해 군사를 함부로 움직이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기 위한 내용이다. 안보된 어보는 기존의 인영(印影)과 비교하여 크기나 보문은 동일하나 서체가 소전에서 구첩전으로 바뀌었다. 사용 기간은 제작한 해인 1495년부터 새로 개조한 해인 1876년(고종 13)까지 약 381년간이다. 개조한 유서지보 관련 기록은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실려 있다. 재질은 동제 도금이며, 크기는 10.2×10㎝로 기존에 제작한 유서보보다 세로로 2㎜ 크게 제작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서를 통하여 유서지보가 찍힌 현상을 보면 숫자는 대부분 홀수로 확인된다. 찍힌 횟수가 한 번 이상일 경우에는 문서의 점련 부분이나 내용의 중간에 위치한다. 안보의 수는 조선후기로 내려올수록 늘어나는 현상을 보인다. 이는 일정한 규칙이 없지만 후기로 내려올수록 유서를 쓴 종이가 커지고, 본문의 내용이 많아지면서 안보 수 또한 늘어난 것으로 파악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
  •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
  •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3.
  • 노인환, 「조선시대 유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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