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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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순헌황귀비 엄씨 |
한글표제 | 순헌황귀비 엄씨 |
한자표제 | 純獻皇貴妃 嚴氏 |
분야 | 왕족/후궁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철종~순종 |
집필자 | 김가람, 황선희 |
이칭 | 황귀비 엄씨(皇貴妃 嚴氏) |
봉작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시호 | 순헌(純獻) |
출신 | 왕족 |
성별 | 여자 |
출생 | 1854년(철종 5) |
사망 | 1911년(순종 3) |
본관 | 영월(寧越)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 |
증조부 | 엄성복(嚴性復) |
조부 | 엄재우(嚴載祐) |
부 | 엄진삼(嚴鎭三) |
모_외조 | 밀양 박씨(密陽朴氏) : 박치순(朴致順)의 딸 |
형제 | (동생)엄봉원(嚴鳳源), 엄학원(嚴鶴源), 이용세(李容世)의 처 |
처_장인 | 고종(高宗) →(자녀)1남 |
자녀 | (1자)영친왕(英親王)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
총론
[1854년(철종 5)~1911년(순종 3) = 57세]. 조선 26대 왕인 고종(高宗)의 후궁. 시호는 순헌(純獻)이다. 본관은 영월(寧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증 찬정(贈贊政)엄진삼(嚴鎭三)이며,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박치순(朴致順)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참찬(參贊)을 지낸 엄재우(嚴載祐)이고, 증조 할아버지는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엄성복(嚴性復)이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비어 있던 황후의 역할을 하였으며, 1897년(고종 34) <대한제국(大韓帝國) 선포> 이후 황비(皇妃)를 거쳐 황귀비(皇貴妃)로 책봉되었다. 고종과의 사이에서 1남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영친왕(英親王)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이은(李垠)이다.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는 1854년 11월 평민인 엄진삼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가세가 좋지 않았으므로 8살에 입궐하여 경복궁(景福宮)의 나인으로 배치되었다가, 이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32살이 되던 1885년(고종 22) 고종의 승은(承恩)을 입었으나 명성황후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궁에서 쫓겨났다가,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직후 다시 입궐하였고, 훗날에는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비어 있는 왕비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고종의 승은을 입고 이후 총애를 받은 것에 비하여 순헌황귀비의 외모는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순헌황귀비의 외모가 명성황후와 닮았고 권모와 지략도 비슷했다는 기록을 보아,[『매천야록(梅泉野錄)』] 고종은 순헌황귀비가 당시 자신을 도와 왕실의 혼란을 수습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1896년(고종 33)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종은 순종과 순헌황귀비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였는데, 당시 순헌황귀비는 고종의 수라를 담당하는 신분이었다. 그러다가 1897년(고종 34) 순헌황귀비는 고종과 함께 경운궁(慶運宮)으로 환궁하였고, 얼마 후인 그해 10월 이은을 낳고 귀인(貴人)이 되었다.[『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34년 10월 20일, 고종 34년 10월 22일] 이어 1900년(고종 37) 8월에는 이은이 영왕(英王)으로 봉해졌는데, 명(明)나라에서 제후급 왕들과 황제의 아들로서 왕이 된 자를 구분하기 위하여 황제의 아들에게 친왕(親王)이라 표현한 것을 따라 영친왕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이때 순헌황귀비는 순빈(淳嬪)으로 책봉되었으며,[『고종실록』 고종 37년 8월 3일, 8월 17일] 1901년(고종 38)에는 아들이 왕으로 책봉되었으므로 그 어머니는 황비로 승봉(承奉)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듭됨에 따라 순헌황귀비는 순비(淳妃)가 되고, 경선궁(慶善宮)이라는 궁호를 받았다.[『고종실록』 고종 9월 14일, 9월 20일, 9월 22일 고종 38년 10월 5일, 고종 38년 10월 14일]
이어 이듬해인 1902년(고종 39)부터 여러 신하들이 조선이 대한제국이 되었으므로 이에 맞게 칭호를 내릴 것을 거듭 요청함에 따라,[『고종실록』 고종 39년 10월 13일, 고종 39년 10월 14일, 10월 24일] 1903년(고종 40) 순헌황귀비는 황귀비로 책봉되었다.[『고종실록』 고종 40년 12월 25일] 이후 1906년(고종 43)에는 순헌황귀비를 황후로 높이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고종은 국가의 큰 예식이라는 것을 이유로 승낙하지 않았다.[『고종실록』 고종 43년 10월 24일] 결국 순헌황귀비는 황후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계속해서 순헌황귀비를 황후로 책봉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것을 볼 때 순헌황귀비의 지위가 상당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1907년(순종 1) 7월 고종이 <헤이그 밀사 파견>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하여 순종(純宗)에게 황위를 양위(讓位)하였다. 그리고 순종에게 후손이 없자 그해 8월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고,[『순종실록(純宗實錄)』 순종 1년 7월 19일, 순종 1년 9월 7일] 이어 12월 영친왕은 유학이라는 명목 하에 일본에서 일본식 교육을 받게 되었다.[『순종실록』 순종 1년 12월 5일] 이후 순헌황귀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친왕이 조선에 귀국하지 못하는 바람에 두 모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순종이 폐위되어 이왕(李王)이 되면서 영친왕은 왕세자로 격하되었고, 이듬해인 1911년 7월 순헌황귀비는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순헌황귀비의 나이는 57세였다.
여성 교육의 토대 마련
1900년대 초반 순헌황귀비는 교육의 필요성에 대하여 절감하였다. 특히 여성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년 4월 24일] 그리하여 1906년(고종 43) 순헌황귀비는 사촌 동생인 엄준원(嚴俊源)의 도움을 받아 현재 진명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 되는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와 현재 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를 설립하였는데, 진명여학교는 무의무탁한 여학생들을 위한 학교였으며,[『대한매일신보』 1906년 5월 8일] 명신여학교는 고위층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였다. 이때 순헌황귀비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여학교 설립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인 기부를 통하여 교육이 지속될 수 있게 하였다.[『황성신문(皇城新聞)』 1907년 2월 21일, 1908년 6월 20일, 『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7일] 또한 이듬해에는 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진명부인회(進明婦人會)에게 가옥 1채를 하사하는 덕분에 현모양처의 자질을 양성 완비한다는 취지로 1906년 설립된 양규의숙(養閨義塾)이 이곳에서 교육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황성신문』1907년 8월 20일] 이렇듯 순헌황귀비는 여성 교육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관심을 표명하였고, 이에 순헌황귀비가 세상을 떠나자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 학생들이 덕안궁으로 참배를 오기도 하였다.[『순종실록부록(純宗實錄附錄)』 순종 5년 6월 24일]
이 외에도 1907년(고종 44)에는 1905년(고종 42)에 엄주익(嚴柱益)이 설립한 현재 양정고등학교의 전신인 양정의숙(養正義塾)이 재정난에 처하자 경선궁과 영친왕궁(英親王宮)에 속한 전라남도와 경기도의 토지 약 200만 평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도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보내는 등 순원황귀비는 20세기 초반 학교 설립을 통한 황실의 교육 정책에 토대를 마련하였다.
후손과 묘소
1911년 7월 세상을 떠난 순헌황귀비의 묘소는 그해 8월 명성황후의 묘소가 있던 홍릉(洪陵) 지역에 만들어 졌고, 이곳을 영휘원(永徽園)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고종과의 합장을 위하여 명성황후의 묘소를 천장(遷葬)하면서 현재는 영휘원과 숭인원(崇仁園)만이 남아 있는데, 숭인원은 순헌황귀비의 손자인 이진(李晋)의 묘역을 가리킨다. 곡장(曲墻)을 비롯하여 상설(象設)과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등을 갖추고 있다. 1991년 사적 제361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순헌황귀비의 신주는 현재 칠궁(七宮)에 모셔져 있다. 1903년(고종 40) 순헌황귀비는 경선궁이라는 궁호를 받고 옛 명례궁(明禮宮) 터에 궁을 짓고 살았는데, 1911년 7월 세상을 떠난 후 이곳의 이름을 덕안궁(德安宮)으로 고쳤다. 이어 1913년 지금의 태평로 1가에 순헌황귀비의 묘우(廟宇)를 새로 지어 덕안궁이라고 부르다가, 1929년 7월 육상궁(毓祥宮)으로 신주를 옮겼다. 그러면서 7개의 신주를 모셨다는 의미로 이곳을 ‘칠궁(七宮)’이라 부르게 되었다.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12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순헌황귀비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1남을 두었는데, 바로 영친왕이은이다. 순종이 후손이 없던 까닭에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의민황태자가 되었다. 영친왕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방되면서 일본의 나시모토 노미야[利本宮]의 딸과 결혼했으며, 이 사람이 이방자(李方子)이다. 영친왕은 이방자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 이진은 태어난 지 8개월 만인 1922년에 사망하여 숭인원에 묻혔으며, 둘째 아들 이구(李玖)는 주로 미국과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1996년 귀국한 뒤 2005년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순종실록(純宗實錄)』
- 『순종실록부록(純宗實錄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기내능원지(畿內陵園誌)』
- 『매천야록(梅泉野錄)』
- 『선원록(璿源錄)』
- 『선원보감(璿源寶鑑)』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황성신문(皇城新聞)』
- 『두산백과』
- 『민족문화대백과』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 박영규, 『환관과 궁녀』, 웅진 지식하우스, 2009.
- 신명호, 『조선공주실록』, 역사의 아침, 2009.
- 윤정란, 『조선왕비 오백년사』, 이가출판사, 2008.
- 지두환, 『고종황제와 친인척』, 역사문화, 2009.
- 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
- 한기언, 『한국교육사(韓國敎育史)』, 박영사,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