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식(成軾)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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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성식 |
한글표제 | 성식 |
한자표제 | 成軾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선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경보(敬甫)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42년(중종37) |
사망 | 1600년(선조33) |
본관 | 창녕(昌寧)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고양(高陽) 구이동(仇耳洞) |
증조부 | 성담명(成聃命) |
조부 | 성운(成雲) |
부 | 성수국(成壽國) |
모_외조 | 동래정씨(東萊鄭氏): 정지영(鄭之英)의 딸 |
처_장인 | 창원유씨(昌原兪煥): 유환(兪煥)의 딸 →(자녀)3남 2녀 |
자녀 | (1자)성진형(成震亨) (2자)성진명(成震名) (3자)성진업(成震業) (1녀)김각(金珏)의 처 (2녀)이후재(李厚栽)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성식(成軾) |
총론
[1542년(중종37)∼1600년(선조33) = 59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경보(敬甫)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진주판관(晉州判官)성수국(成壽國)이고,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정지영(鄭之英)의 딸이다. 병조 판서성운(成雲)의 손자이고, 창산군(昌山君)성수익(成壽益)의 조카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64년(명종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10)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權知)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 검열(檢閱)을 거쳐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예조 ・ 병조의 좌랑을 지냈고,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외직으로 나가서 3도 해운판관(海運判官)을 지냈다. 다시 들어와 병조 정랑으로 승진되고, 사헌부 지평(持平) · 사간원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16) 호조 정랑에 임명되어, 황해도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가서 민정을 살폈다. 다시 예조 정랑을 거쳐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나갔다가, 성균관에 들어가서 직강(直講) · 사예(司藝)로 승진되었고, 한성부 서윤(庶尹)에 임용되고, 사복시(司僕寺)정(正)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승진되고, 풍저창(豊儲倉) 수(守)를 거쳐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나갔는데, 그때 왜인(倭人)들의 심상찮은 정보가 있자 수원은 국가의 길목이라 하여 무관 출신으로 교체되었다. 사섬시(司贍寺) 정을 거쳐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나갔는데,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무관 출신으로 다시 교체되었다. 그해 모친상을 당하여 전쟁 중에 가매장(假埋葬)하였다. 3년 상을 마치고 1595년(선조28)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나갔으나, 모친을 가매장하였다고 비방을 받아서 물러났다. 군자감(軍資監) · 사섬시의 정을 거쳐, 1596년(선조29) 덕원부사(德原府使)로 나갔다가, 종부시(宗簿寺) · 상의원(尙衣院)의 정을 지냈다. 1600년(선조33) 전라도 추고경차관(推考敬差官)으로 나가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은진(恩津)에 사는 맏딸 집에 들렀다가, 오랫동안 앓아오던 담증(痰症)이 갑자기 악화되어 죽었는데, 향년이 59세였다. 글씨는 본래 성씨 집안의 장기(長技)였는데, 성식도 글씨를 잘 썼다.
성품과 일화
성식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실하고 부지런하였으며 정직하고 자상하였다. 전후로 관직에 있으면서 한결같이 근실(勤實)하게 봉직하였고, 스스로 자기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비루한 짓이나 부정한 일을 철저하게 경계하였으므로 누구도 감히 청탁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외직에 있을 때는 누구에게나 자상하고 백성들을 아끼는 정사를 베풀었다. 1583년(선조16) 호조 정랑으로서 황해도의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 배천군(白川郡)에 오래 묵은 억울한 옥사(獄事)가 있었는데, 그가 즉시 해결하니 때마침 심하게 가물다가 단비가 내렸으므로 사람들은 기뻐하여 그 비를 ‘어사단비[御史雨]’라고 불렀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그는 젊었을 때 술을 몹시 좋아하여 이웃에 살던 간이(簡易)최립(崔岦)과 탁이(卓爾)이율(李硉)과 시간만 나면 서로 대좌하여 마냥 술을 마시고 취하여 즐거워하였다. 세 사람은 기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였으나, 풍도는 한결같이 두보(杜甫) 같은 고인(古人)을 따르고, 주량(酒量)도 서로 대적할 만하였다. 당시 성식은 집이 몹시 가난하고 부모가 늙었으나, 열심히 학문을 계속하여 마침내 출세하였다. 재주로 보면 이율이 가장 나았으나, 그는 과거에 거듭 실패하였다. 그러나 최립은 학문을 대성하고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최립은 그의 비문에서 성식을 ‘대인(大人)’이라 칭송하고, “마침내 사람이 얻고 얻지 못하는 것은 판이한데, 그는 과연 이루어낸 사람이다.”라고 칭찬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 구이동(仇耳洞)의 선영에 있는데, 그의 친구 최립이 지은 묘갈명(墓誌銘)이 남아 있다.(『간이집(簡易)』) 부인 창원유씨(昌原兪煥)는 유환(兪煥)의 딸인데,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계미기사(癸未記事)』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간이집(簡易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혼정편록(混定編錄)』
- 『약포유고(藥圃遺稿)』
- 『은봉전서(隱峯全書)』
- 『노서유고(魯西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