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창(社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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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또는 지방관이나 유력자에 의해 면리에 설치하였던 곡물 창고.

개설

사창은 남송(南宋)주자(朱子)의 사창론(社倉論)에 의거하여 조선시대에 설치된 곡물 창고였다. 국가 또는 지방관, 민간의 유력자에 의해 면리(面里)에 설치되었으며 사창의 곡식은 진휼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본래 주자는 이전의 의창(義倉)을 다듬어서 시행하였는데 주자학을 숭상하던 조선에서는 전기부터 이 제도를 본받으려고 지속적으로 논의하였고 국가정책으로 일부 지역에서 시도하였다(『세종실록』 5년 9월 16일). 국가나 관에서 시행을 중단한 뒤에는 일부 지역에서 사족들이 사창을 시행하였으며 향약이나 계(契)의 형태로 변용하기도 하였다.

대체로 조선전기와 중기에는 환곡(還穀)이 부호들에게 주로 돌아가는 바람에 일어나는 불균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사창을 논의하였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환곡의 부세 기능이 커지면서 지방관청의 수탈을 막으려고 민간에서 직접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1862년 농민 항쟁이 일어난 뒤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의 삼정(三政)에 대한 개정책을 마련하면서 사창제가 다시 논의되었지만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대원군 정권 때 별비곡(別備穀)을 이용하여 사창제를 시행한 바 있으며(『고종실록』 4년 6월 6일), 1894년 갑오개혁 때 사환조례(社還條例) 또한 사창을 근간으로 하였다(『고종실록』 32년 윤5월 26일).

제정 경위 및 목적

사창은 의창, 상평창(常平倉)과 함께 우리나라 진휼정책의 근간이 되는 창고였다. 사창은 의창과 내용이 거의 동일하였으며,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의창을 보급하는 형태로 설치되었다.

본래 사창을 처음 만든 이는 주자였다. 그에 앞서 수(隋)나라의 탁지상서(度支尙書)장손평(長孫平)이 의창의 법을 제정하였는데 주자가 그것을 다듬어서 사창을 만들어 향리에서 시행하였다. 사창이라는 명칭은 향사(鄕社)에서 곡식을 저장하고 나누어 주는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남송에서는 주자가 건의하여 각지에 사창을 설치하였다. 이후 명·청대 향촌사회에서도 사창이 지속적으로 장려되었다.

중국의 사창제도는 조선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고려말 이후 주자학이 세력을 떨치면서 사창은 유교이념에 따른 행정체계의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으며 조선왕조에 이르러 그 시행이 더욱 적극적으로 논의되었다.

세종 때 논의의 배경은 의창의 원곡(元穀) 부족과 그것을 보충하는 데 따른 군자곡(軍資穀)의 감소를 막으려는 데 있었다. 본래 의창곡은 원칙적으로 이자를 붙이지 않았다. 따라서 농민이 유망(流亡)하거나 흉년으로 갚을 수 없을 경우에 회수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고, 결국 의창곡을 탕감하게 되어 원곡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에 정부는 의창의 원곡을 보충하기 위하여 연호수미법(煙戶收米法)을 실시하거나 군자곡으로 보충하기도 하였다.

연호수미법은 토지와 호구 수에 따라 일정량의 쌀을 거두는 법이었다. 그 결과 군자곡마저도 환곡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대응책에도 불구하고 의창 원곡은 계속 줄어들었고 진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새로운 대책이 절실하게 되자 사창 설치론이 거론되었다.

내용

1428년(세종 10) 호조(戶曹)에서 사창을 촌락에 설치하고 정부에서 원곡을 빌려주도록 건의하였다(『세종실록』 10년 1월 21일). 이것을 시작으로 1444년(세종 26)에는 의정부의 건의에 따라 사창제도를 집현전에서 연구하게 하였다(『세종실록』 26년 7월 12일). 이에 집현전 직제학이계전(李季甸)이 6개 항의 사창 사목(事目)을 내놓았으나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1448년(세종 30) 세종은 사창의 실시를 주장하던 이보흠(李甫欽)을 직접 대구로 보내어 사창을 설치해서 시험하도록 명하였다(『세종실록』 30년 6월 1일). 그는 13개의 사창에 각각 의창곡 200석을 대여하였으며 1석당 이자로 3두를 받게 하였다. 1451년(문종 1)까지 운영한 결과 이자가 모두 2,700여 석에 달하여 1개의 사창당 원곡과 이식을 합해 400여 석이나 되었다. 이렇게 비축된 사창곡을 의창과 함께 수시로 빈민에게 빌려주자 고을 내 주민 가운데 사적으로 장리(長利)를 받는 자가 이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대구에서의 시험이 성공하자 이를 경상도 전역에 실시하기 위하여 각 읍에 시행 여부를 물었다. 12개 읍에서 찬성하였고 문종은 그 가운데 10읍에서 실시하도록 하였다(『문종실록』 1년 11월 25일).

이처럼 경상도 몇 개 읍에서 사창을 시험적으로 실시하였지만 세조 이후부터는 더 이상 운영되지 않았다. 사창곡이 제대로 회수되지 못하였고 또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창을 폐지하자는 건의가 계속되다가 1470년(성종 1) 호조의 계청(啓請)으로 혁파되었다. 다만 국가나 관이 주도하는 사창은 폐지되었지만 사족들에 의한 사창은 몇 개 지역에서 사례가 나타난다. 사창의 실시는 상호부조(相互扶助)라는 측면이 강하므로 이후 사창은 향약에 부분적으로 흡수되어 대체되거나 각종 계의 활발한 조직과 운영으로 성격이 변질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 환곡이 부세화하면서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꿔 주는 진대(賑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민간에서 진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창에 대하여 다시 논의가 일어났다. 사창 설치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정중(閔鼎重)·이유태(李惟泰)·이단하(李端夏)·이현일(李玄逸)·박세채(朴世采)·서종태(徐宗泰)·이형상(李衡祥)·황익재(黃益再)·안정복(安鼎福) 등을 들 수 있다. 1684년(숙종 10)에는 좌승지이단하의 건의에 따라 각 도에 사창 절목(節目)을 반포하였다. 이단하는 사창의 설치를 필생의 과제로 삼았는데 그의 목표는 부호들이 환곡을 독점하여 일어나는 환곡의 불균등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국가로서는 사창의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기존의 환곡제와 별도로 사창을 운영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사창이 운영되었는데 지방관, 또는 민간이 주도하였다. 17~18세기에 지방관 주도의 사창은 경기도 양주·여주·지평, 함경도 길주, 충청도 옥천, 전라도 임실·순천 등지에서, 그리고 민간 주도의 사창은 충청도 옥천·회덕·이성, 경기도 광주·여주, 경상도 인동·안동, 전라도 순천 등지에서 시행되었다고 한다. 다만 지방관이 설치한 경우는 빈민 구제뿐만 아니라 잡역 부담에도 활용하였으므로 사창이라고 일컫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설치된 사창도 국가의 입장만이 아니라 지방관청의 반대, 부민들의 기피, 향촌 유력자들의 반발 등으로 지속적으로 시행하기는 어려웠다.

사창에 대한 주장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특히 정조 때는 관리나 지방 유생들에게 환곡제 개정에 관하여 의견을 묻는 일이 많았다. 1786년(정조 10) 왕의 구언(求言) 요청에 따라 올라온 글 가운데 훈련원 판관유한충(兪漢忠)의 상소에는 사창제 실시를 주장하는 내용이 보였다. 1798년(정조 22) 정조의 「권농정구농서윤음(勸農政求農書綸音)」에 대해서는 유진목(柳鎭穆) 등 여러 사람이 환곡제의 폐지와 사창제 실시를 제언하였다.

그러나 사창은 원곡을 마련해야 하였고, 지속적인 운영에도 어려움이 따랐다. 예를 들면, 안의현감 박지원(朴趾源)은 구휼미를 이용하여 사창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후임자가 준수하지 않을 때 생기는 폐단을 생각하고는 중단하였다. 더구나 기존의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실시하는 것은 18세기 후반 무렵 국가 재정의 절반을 환곡에 의존하고 있는 정부로서는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다. 당시 정약용(丁若鏞)이 잘 파악하였듯이 환곡의 목표는 이미 국용(國用)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재정 마련에 있었고 사창은 그 본뜻이 어려움을 처한 백성을 구제하는 구민(救民)에 있었기 때문에 환곡을 사창으로 개편하려는 것은 양자의 본질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 한 차례 더 사창이 논의되었다. 1804년(순조 4)에 우의정이경일(李敬一)이 주자의 사창법과 우리나라의 환곡제를 병행해 취모(取耗), 즉 이자를 거두자고 주장하였다. 그의 제안은 본래의 사창제를 도입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환곡의 취모보용(取耗補用) 성격은 그대로 두어 백징(白徵)의 폐를 막고, 서리의 중간 수탈을 막기 위하여 면리마다 사창을 설치하여 민간이 직접 운영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이런 내용은 면리에 외창(外倉)을 가설하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당시 환곡의 폐단이 가장 심한 전라도·경상도·황해도·평안도 지방에서 이러한 형태의 사창을 시행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지역 감사는 보고서를 통해 사창제 시행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부는 일부 감사를 파면하는 등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지방에서 사창 설치를 반대하는 이유는, 사창이 설치되면 그 운영권이 양반 사족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관의 수입원이 상실되거나 감소되기 때문이었다. 특히 지방관청의 서리층에게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기에 적극 반대하였다. 따라서 이때도 환곡의 분급을 고르게 하는 수준에서 정리되고 말았다. 다만 이 무렵 일부 지역에서는 사창제를 시도한 것으로 보였다. 같은 해 의령현감박종구(朴宗球)는 조(租) 200석으로 ‘민간 사곡(社穀)의 본(本)’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앞 시기의 지방관이 주도한 사창의 사례라고 하겠다.

사창제는 19세기 후반에 들면서 적극적으로 논의되었다. 1862년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일대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난 농민 항쟁으로 인해 삼정에 대한 개혁 논의가 일어났다. 왕의 물음에 답하는 형식을 취하는 응지소(應旨疏)를 통하여 사창제가 건의되었고, 삼정이정책(三政釐整策)을 만든 중심인물인 조두순(趙斗淳)도 사창제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환곡 모조가 이미 국가 재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창의 본래 취지대로 운영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삼정이정청은 사창제 시행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다만 이듬 해 강원도의 환곡이정을 통하여 환폐가 가장 심한 원주 지역에서 민이 원한다면 사창을 실시할 수 있다는 여운을 남겼다. 결국 사창제는 삼정이정에서 제외되고, 대신 환곡을 파기하여 토지에 결세를 부과하는 방식(罷還歸結)과 환곡을 대신하여 별도의 항류곡(恒留穀)을 두는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1864년(고종 1) 충청도에서 사창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충청도는 1862년의 대책으로 대부분의 환곡 포흠(逋欠)을 탕감하고 30,000석만을 남겼다. 이렇게 대폭 축소된 환곡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먼저 서리들에 의한 운영의 폐단을 막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에 따라 사창을 두어 면리의 두민(頭民)을 통하여 운영하고자 하였다. 이때의 사창은 별도의 창고를 두거나 서리의 손을 빌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존의 환곡 운영과는 달랐다. 그러나 원곡 모두를 분급하였고, 모조 전부를 관에서 활용한 점 등으로 볼 때 본래의 사창제라기보다 서리의 관할에서 벗어나 민간에 책임 지우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 뒤 1867년(고종 4) 호조에서 별비곡(別備穀)을 설치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창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사창제가 미리 논의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당해 6월 3일 당백전(當百錢) 1,500,000냥으로 환곡 복구를 명하고 난 다음 호조 판서김병국(金炳國)이 사창제를 요청함으로써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의 사창곡은 호조의 별비곡이었으므로 원칙적으로는 호조별비곡만을 사창곡이라고 일컬어야 하였으나, 사창제를 실시하면서 지난해에 분급되었던 병인별비곡(丙寅別備穀)도 사창곡에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대원군이 처음부터 사창을 목적으로 별비곡을 설치한 것은 아님을 말해 준다.

따라서 사창제의 시행이 대원군대 환곡정책의 개혁성을 보여 준다고 평가하기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당시 환곡 운영이 지방 사회에서 크게 문제를 일으키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사창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당시 호조 판서김병국이, 호조별비곡이 설치되는 시기와 맞물려 대원군에게 사창 실시를 건의하였고, 이로써 시행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때의 사창은 주자의 사창을 본받으면서도 현행 환곡제를 절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내용은 면 단위로 책임자인 사수(社首)를 뽑아 그를 중심으로 한 향촌민에게 일임하고 이속(吏屬)들이 간여하지 않게 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분급 기준을 면내 각 동의 크기와 빈부에 따라 정하여 불균등을 없애려고 하였다. 한편 모조는 1석마다 1두 5승씩을 상정가(詳定價)로 하여 이것을 돈으로 환산한 후 읍-감영-호조의 경로로 중앙에 납부되었다.

이때의 사창 운영은 별비곡 중심이어서 전체 환곡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지역적으로도 5도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사창이 시행된다고 하여 환곡의 폐단이 모두 시정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창제를 시행함으로써 오랜 세월에 걸친 환곡의 개정과 변통에 대한 단서가 열리게 되었다.

변천

사창의 실시를 바탕으로 갑오개혁 때 「사환조례(社還條例)」가 자연스레 법제화될 수 있었다. 곧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이 탁지부령 제3호로 「사환조례」를 제정하였는데, 이는 내용상 고종대 사창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전국의 환곡을 사환(社還)으로 개칭하였는데 이는 ‘사창 환곡’의 준말로서 기본적으로 사창을 근간으로 하였다. 당연히 종래 환곡에서의 취모보용(取耗補用)의 기능을 없애고 진휼 기능만 남겼다. 운영은 향촌민에게 맡겼다. 사창의 책임자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사수였다. 갑오개혁 때 「사환조례」의 법제화는 그 뒤 근대적 면제(面制)와 금융조합제를 실시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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