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朴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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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4년(중종 29)~1593년(선조 26) = 60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에 활동한 무신. 행직(行職)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이고, 증직(贈職)은 병조 판서(判書)이다. 자는 청원(淸源)이다. 본관은 울산(蔚山)인데, 아버지는 별제(別提)박영무(朴英珷)이고, 어머니 정씨(鄭氏)는 직장(直長)정인걸(鄭仁傑)의 딸이다.

명종 · 선조 시대 활동

1556년(명종 1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가 강계부판관(江界府判官)으로 나갔다. 내자시(內資寺) 판관, 이산군수(理山郡守), 의빈부(儀賓府)도사(都事)를 역임하고 정평부사(定平府使)로 임명되었다. 정사를 잘하여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으나 5년 만에 파직되었다.

1572년(선조 5)에 해서(海西)에 도적이 일어났는데, 그때 마침 명(明)나라 사신이 오게 되었으므로 지략과 무예의 명망을 갖춘 그가 평산부사(平山府使)에 임명되었다.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시묘(侍墓) 살이를 하고 상복(喪服)을 벗자, 도총부(都摠府) 도사에 임명되었는데 미처 부임하기 전에 영암군수(靈巖郡守)로 임명되었다. 영암군수로 3년간 있다가 돌아와 비변사(備邊司)낭청(郎廳)이 되었고, 천성만호(天城萬戶)로 나갔다가 1년이 넘은 후에 부산첨사(釜山僉使)로 임명되었다. 이때 대간(臺諫)이 탄핵하는 바람에 해직되어 돌아와 귀성부사(龜城府使)에 임명되었다.

1580년(선조 13)에 만포첨사(滿浦僉使)가 되었다. 이때 군정(軍政)을 정비하고 호인(胡人)들을 불러 어루만지며 위엄과 신의를 보이니, 호인들이 감동하고 두려워하여 노획한 포로를 돌려보내고 앞서 불법으로 개간한 전지의 경계를 바로잡는 등 그가 떠날 때까지 감히 침범하지 않았다. 1583년(선조 16)에 임기가 차 돌아오는 길에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북방의 오랑캐가 난을 일으켰으므로 방책(方策)을 세워 오랑캐의 추장을 유인하여 항복을 받고 빌려간 곡물 수 백, 수 천석과 우리 백성 남녀 50여 명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성을 수리하고 병기를 갖추고 병사를 훈련하는 등 정성을 다 하였다. 그 뒤 서반(西班)호군(護軍)으로 기용되어 금위(禁衛)를 겸임하고 또 내승(內乘)을 겸임하였다. 그 후 덕원부사(德源府使)에 부임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파직되어 돌아왔다.

1587년(선조 20)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다. 상복(喪服)을 벗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임진년인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왜적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침범하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서 왜적의 선봉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중과부적(衆寡不敵)하여 본진을 소각하고 죽령(竹嶺)으로 후퇴하여 적을 방어하려고 하였으나, 조령(鳥嶺)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달려가니, 선조가 서쪽으로 떠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행재소(行在所)를 찾아가기 전 도중에서 원수(元帥)김명원(金命元)을 만나 좌위 대장(左衛大將)에 임명되어 같이 임진(臨津)을 수비하였다. 신할(申硈)·유극량(劉克良) 등과 같이 병사를 나누어 파주(坡州)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여러 장수들은 모두 패배하여 죽고, 그만 혼자 휘하의 병사를 그대로 이끌고 돌아왔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임진강 하류의 군대가 붕괴되자 왜적이 곧바로 개성으로 들이 닥쳤다. 그는 원수를 따라 샛길을 통해 평양(平壤)으로 달려가 급수문(急水門)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평양에서 패배하여 장차 의주(義州) 행재소로 가려고 하였다. 그때 순변사(巡邊使)이일(李鎰)이 그에게 말하기를,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들이 쓸데없이 죽으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지금 해서(海西)로 가 한쪽 지역이라도 지키고 있으면 후일 조정에서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이 말을 옳게 여겨 순변사와 함께 평산에 이르러 병력을 수습하여 적진(賊陣)을 공격하기로 계책을 세웠다. 그런데 이천(伊川)에 주둔한 세자(世子)가 급히 그를 불렀으므로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갔다. 세자를 따라 성천(成川)으로 들어가 우위대장(右衛大將)이 되었고, 또 의용도대장(義勇都大將)이 되어 평양 지대로 나가 여러 번 싸웠으나 전공을 크게 세우지는 못하였다.

그는 평양에 도착한 뒤 사헌부(司憲府)를 위시한 조신들로부터 영토를 지켜야 할 신하로서 책임을 회피하고 군율(軍律)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때가 전시이고 또 후퇴하던 과정에서 종군(從軍)한 것이 감안되어 처벌은 면하였다. 1593년 (선조 26) 1월에 평양이 수복되자 그는 원수김명원을 따라서 파주까지 종군하였으나, 지병이 심해졌으므로 휴가를 받아 배를 타고 귀향하던 도중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0세였다.

성품과 일화

박홍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자품이 웅장하고 도량이 큰데다가 기예와 기국이 있어 가는 곳마다 명성이 대단하게 나 서리와 백성들이 사모하였다. 젊어서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을 때, 한 떼의 무리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믿고 능멸하자 그가 혼자 주먹을 휘둘러 30여 명을 굴복시키니, 사람들이 그의 용맹을 칭찬하였다. 어려서부터 지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었고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형을 아버지처럼 섬기었는가 하면 스스로 이연가(二連歌)를 지어 추모의 뜻을 붙여 부르니, 들은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친척을 인정으로 대하였고 사람들에게 은혜와 원한으로 구별을 짓는 일이 없었으므로, 훌륭하게 여기었다.

추증과 묘소

묘소는 충청도 대흥현(大興縣) 봉수산(鳳壽山) 선영의 아래에 있다. 김상헌(金尙憲)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병조 참판(參判)추증(追贈)되었는데, 나중에 큰아들 박진남(朴震男)이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었으므로 병조 판서(判書)의금부(義禁府)지사(知事)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재사초(寄齋史草)』
  • 『난중잡록(亂中雜錄)』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