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주(朴漢柱)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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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한주 |
한글표제 | 박한주 |
한자표제 | 朴漢柱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조~연산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천지(天支) |
호 | 우졸재(迂拙齋)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59년(세조 5) |
사망 | 1504년(연산군 10) 5월 12일 |
본관 | 밀양(密陽)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박문빈(朴文彬) |
조부 | 박신보(朴臣輔) |
부 | 박돈인(朴敦仁) |
저술문집 | 『우졸재집(迂拙齋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한주(朴漢柱) |
총론
[1459년(세조 5)~1504년(연산군 10) = 46세]. 조선 전기 성종(成宗)~연산군(燕山君)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과 사간원 헌납(獻納) 등을 지냈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자는 천지(天支)이고, 호는 우졸재(迂拙齋)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거주지는 대구(大丘)이다. 아버지는 문의훈도(文義訓導)박돈인(朴敦仁)이며, 할아버지는 박신보(朴臣輔)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박문빈(朴文彬)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기도 하다.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성종~ 연산군 시대 활동
박한주(朴漢柱)는 25세인 1483년(성종 14)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485년(성종 16) 문과(文科)별시(別試)에 급제하였다. 전생서(典牲署)직장(直長)이 되었다가, 1488년(성종 19)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이 되었다.[『성종실록(成宗實錄)』성종 19년 5월 20일] 1491년(성종 22) 2월 선무랑(宣務郞)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그 뒤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 등을 역임하였다.[『성종실록』성종 22년 2월 22일] 그 뒤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자진해서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나갔는데, 고을을 잘 다스리는 공을 인정받아 한 자급이 올랐다.[『성종실록』성종 24년 12월 15일, 성종 24년 12월 24일]
임기를 마치고 들어와 종부시(宗簿寺)주부(主簿)가 되었고, 1497년(연산군 3) 3월에는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었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연산군 3년 3월 6일] 이 때 그는 “전번 홍문관(弘文館)에서 경연(經筵)에 납시기를 청할 때, 안질이 있다고 답하셨습니다. 진연(進宴)에는 안질로 사양하지 않으시고, 경연에는 납시지 않나이까? 성종(成宗)께서 문소전(文昭殿) 친향(親享)하시던 날, 정승(政丞) 정인지(鄭麟趾)가 아뢰기를, ‘세종(世宗)께서는 친히 사열(査閱)하신 후에 날이 늦더라도 또한 경연에 납시었으니, 지금 제사를 끝낸 후 역시 진강(進講)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성종께서 곧 좇았습니다. 이것은 조종의 가법(家法)이오니 빨리 납시도록 하옵소서.” 라며 연산군의 실덕(失德)을 직간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3년 3월 9일] 또 임사홍(任士洪) 등의 간악함을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연산군의 횡포가 점차 심해지자 그는 다시 외직을 청하여 평해군수(平海郡守)와 예천군수(醴泉郡守) 등을 지냈다.[『연산군일기』연산군 3년 10월 29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4 「경상도(慶尙道)」]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자 김종직(金宗直)의 문도(門徒)로서 이종준(李宗準) 등과 붕당(朋黨)을 지어 국정을 비방한다는 죄명으로 그 해 7월 곤장 80대의 처벌과 함께 평안도 벽동(碧潼)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4년 7월 17일, 연산군 4년 7월 26일, 연산군 4년 7월 27일] 그리고 1500년(연산군 6) 5월 낙안(樂安)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는 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6년 5월 7일]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그 해 5월 12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능지처참되었으니, 이 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연산군일기』연산군 10년 윤4월 27일, 연산군 10년 5월 1일, 연산군 10년 5월 1일, 연산군 10년 5월 8일, 연산군 10년 5월 12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6 「연산조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아울러 그의 아들들도 죄를 주고 고을의 종으로 삼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10년 5월 13일] 그는 탁월하고 고고(孤苦)하여 지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연산군일기』연산군 10년 5월 12일] 저서로 『우졸재집(迂拙齋集)』이 있다.
추증과 제향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을 대신하여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는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1년 10월 2일] 그리고 그 해 10월에는 그의 아들을 녹용하라는 중종의 명이 있었다. 1517년(중종 12) 김정(金淨)과 조광조(趙光祖) 등의 요청에 따라 박한주는 도승지 겸 예문관(藝文館)직제학(直提學)에 추증되었다. 밀양(密陽)의 예림서원(禮林書院), 함안(咸安)의 덕암서원(德巖書院), 대구(大邱)의 남강서원(南岡書院)에 배향되었다.[『여헌집(旅軒集)』 권2, 『연려실기술』 별집 권4 「사전전고(祀典典故)」]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헌집(旅軒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점필재집(佔畢齋集)』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