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戊午史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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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연산군 4) 김종직이 쓴 사초를 빌미로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

개설

무오사화는 1498년에 김종직(金宗直)이 사초(史草)로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단이 되어 발생하였다. 사초가 발단이 되었기에 무오사화(戊午士禍)와 무오사화(戊午史禍)라는 용어가 함께 사용된다. 조의제문은 항우(項羽)가 폐위시킨 초(楚)나라의 마지막 왕인 의제(義帝)를 애도하는 내용인데, 요컨대 세조의 왕위 승계가 유교적 명분에 어긋난다는 사림의 인식을 반영한 글이다. 이로 인해 이미 죽은 김종직뿐만 아니라 그의 문인(門人) 대부분이 화를 당하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 왕조가 개창된 지 한 세기가 지난 16세기에 이르러 중앙의 양반 관료들은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어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훈구파는 개국 공신부터 8차례에 걸친 공신 책봉을 통해 형성된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직접적으로는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세조가 등장하면서 책봉된 공신과 관련된 훈신과 척신을 가리킨다. 이들은 부국강병의 현실주의 노선을 지키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였고, 흔히 훈구라고 칭하기도 한다.

사림은 성종 때에 이르러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왕조 개창에 소극적이었던 정몽주 중심의 온건 개량파 신진 사대부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왕위 찬탈로 인해 성리학적 명분에 있어 취약성을 안고 있었던 세조의 지나친 탄압 정치와 국방 강화책 등의 공리주의적 통치 방식으로 인해 민심은 흩어져 있었다. 이러한 민심을 수습하고 강력한 세력으로 포진한 기성의 훈구대신을 견제하며 유교 정치의 이상을 회복하기 위한 학문 진흥 정책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림의 존재 가치가 인정받았다. 때문에 성종은 김종직을 필두로 그의 문인인 김굉필·정여창·김일손(金馹孫) 등을 등용하였다. 이들은 정몽주·길재·김숙자로 이어지는 경상도 출신의 유학자들에게서 학문의 뿌리를 찾았고, 이들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도통론(道統論) 위주의 성리학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림은 훈구와 갈등을 빚었는데 첫 번째 갈등이 무오사화였다.

발단

무오사화는 연산군 4년 7월에 『성종실록』을 찬수하기 위한 사국(史局)이 열리고, 김일손이 제출한 사초(史草) 가운데 조의제문이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며 발생하였다(『연산군일기』 4년 7월 13일). 사화를 일으킨 고변자는 이극돈(李克墩)·유자광(柳子光) 등 훈구대신들이었다. 그리하여 이미 죽은 그의 스승 김종직뿐만 아니라 당시 조정에 포열해 있던 그의 문인들이 주로 탄압을 당하였다. 사건의 전개 과정은 복잡하였지만 다른 사화와는 달리 ‘사화(史禍)’로 지칭되어 온 것도 이 사초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치권력의 변동에 초점을 두고 파악할 때, 연산군과 삼사(三司)의 대립과 갈등, 즉 왕권과 언관권이 상대적 위치에서 대응하는 군신 권력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발생한 사건이 무오사화였다. 무오사화를 계기로 연산군 초기에 이루어진 삼사의 정치 주도적 입장은 언관 언론을 행사하더라도 그 기세가 서서히 꺾여 갔다. 그 반면에 승정원을 기반으로 한 연산군의 전제적 성향과 악정(惡政)이 점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무오사화와 그 처리 과정을 통해 무엇보다 언관 언론의 기능이 위축되면서 악정의 단초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경과

무오사화 피화인(被禍人), 즉 사화(士禍)에서 처벌된 사람의 치죄 내용을 담은 반사교서(頒赦敎書)에 열거된 죄상은 두 가지로, 조의제문을 통해 선왕인 세조를 저훼한 것과, 이를 작성한 무리가 모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을 맺어 서로 칭예하거나 국정과 시사(時事)를 비방하였다는 것이다(『연산군일기』 4년 7월 27일). 즉 여기에 나타난 죄상만으로 볼 때 김종직의 문인이 붕당을 결성하여 세조 왕위 승계의 정통성을 부정한 것이었다. 당연히 세조부터 비롯된 예종·성종·연산군의 왕위 승계를 정통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었다.

당시 증경정승(曾經政丞)으로서 모든 정사에 참여하고 있던 윤필상(尹弼商)·노사신(盧思愼)은 세조·예종·성종대에 왕권의 확립과 관련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익대공신(翊戴功臣)·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된 누대에 걸친 훈구계 인물들이었다. 또한 당시 좌의정어세겸(魚世謙), 우의정한치형(韓致亨)도 각각 익대공신과 좌리공신에 책봉된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들 훈구계 공신의 입장에서도 조의제문에 나타난 세조의 왕위 승계에 관한 정통성 부정은 용납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당시 『성종실록』의 편수를 위한 사국(史局)의 당상관인 이극돈과 그에게 사초 내용을 전해 듣고 이를 고변한 유자광 또한 각각 좌리공신과 익대공신에 책봉된 인물들이었다. 『연산군일기』에 수록된 이 사건의 고변 과정에도 이들 가운데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이 직접 참여하고 있었다. 여기에 이극돈과 김일손, 유자광과 김종직의 사적인 원한 관계가 무오사화의 처리 과정에서 이극돈과 유자광을 중심적 위치에 놓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조의제문의 내용을 일일이 단종과 세조에 견주어 풀이한 것도 유자광이었다(『연산군일기』 4년 7월 15일).

김일손을 비롯한 김종직 문인들은 이 시기뿐만 아니라 1504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원방부처(遠方付處)되어 있던 인물들까지 재차 여기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따라서 김종직 문인 가운데 출사(出仕)하지 않은 인물이나 피화를 예견하고 미리 은거해 버린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희생되었다. 즉 김종직의 문인으로 간주하는 65명 가운데 40% 이상인 27명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거듭해서 피화되었다. 당시 출사한 김종직 문인은 거의 희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무오사화는 훈구계 재상들의 고변이 계기가 되었으나 연산군은 모든 과정을 주도적 입장에서 처리해 갔고, 대간(臺諫)의 임명에 대해서도 직접 간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무오사화의 발생과 처리 과정에서 오히려 주목되는 사실은 언관 언론의 통제와 위축을 통해 연산군의 전제적 성향이 점차로 노정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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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28: 조선 중기 사림 세력의 등장과 활동』, 국사편찬위원회, 1996.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8.
  • 김돈, 『조선 전기 군신 권력 관계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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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범, 『사화와 반정의 시대: 성종·연산군·중종과 그 신하들』, 역사비평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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